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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뮤지컬 를 보았다. 실로 오랜만의 공연장 나들이였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지난 2년 동안 꼼짝없이 움직이지 않은 데다, 마지막으로 뮤지컬을 본 지가 언제인지, 무슨 작품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이번에 본 뮤지컬은 순전히 즉흥적으로 예매를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내가 그것을 기다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기에 언젠가는 볼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공연을 보러 간 지난 토요일은 살짝 더운 듯했지만, 화창한 날씨였다. 좀 일찍 도착한 우리들은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한 잔 한 후에 공연장에 도착해서 지정된 좌석에 앉아 뮤지컬을 관람했다. 신기하게도, 뮤지컬을 보는 내내 모든 노래들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유튜브나 방송 등에서 의식 혹은 무..

어느푸른저녁 2022.05.24

착각하는 삶, 착각 속의 삶

'우리가 진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가장 소름 끼치는 진실이다.'라고 페르난두 페소아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은 어떤가. '우리는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가장 소름 끼치는 진실이 아닐까?' 꿈 혹은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깨어나려 하지 않는 것. 혹은 그것을 외면하는 것. 착각하는 삶. 그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쩌면 인생이란 거대한 착각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네 삶이 거대한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그곳에 머무는 것은 아닌가. 깨어나는 것은 거대한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고, 두려움을 직시하는 일이기에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착각 속에 빠져 사는 삶은 편하고, 달콤하다. 하지만 거기서 깨어나 진실을 바라보게 된..

불안의서(書) 2022.05.23

나는 막다른 길들을 바라볼 것이다

갑자기, 아무런 낌새도 없고, 어떤 연관성도 찾지 못한 채로, 오래전에 읽었지만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 의지로 찾아진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이상하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을 읽는 동안의 혼란스러움은 생생히 기억나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이것이 이 책의 진정한(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의도인가? 나는 무려 7년 전에 읽었던 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거의 잊고 있던 그 책이, 갑자기 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지금 이 순간 떠오른 이유를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참으로 신기한, 아니,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나는 너무 일찍 그 책을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흔해빠진독서 2022.05.19

에두아르 르베, 《자화상》, 은행나무, 2015.

여행의 끝은 소설의 끝과 같은 슬픈 뒷맛을 남긴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일들을 잊어버린다. 나는 누군가를 죽인 누군가와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 나는 막다른 길들을 바라볼 것이다. 나는 삶의 끝에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7쪽) *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다. 나는 잊는 것을 잊지 않는다.(8쪽) * 나는 때로 비열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주위에 있을 때 더 불편하다.(12쪽) * 나는 이름들의 목록을 만들 때 내가 이름들을 잊을까 두렵다.(37쪽) * 나는 내 꿈들이 작업에 유용할 때 더 잘 기억한다. 내용과 상관없이 꿈들을 다시 상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 꿈들은 너무도 체험한 일들의 기억처럼 구성되어 있어 때로 나는 실제로 일어..

아버지의 침대

아버지는 평소에 침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침대에서 생활하지 않았고, 커서도 침대를 가져보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당연히 침대에서 자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직장을 잡고 한참 뒤에 아파트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침대를 구입하게 되었지만, 그래 봤자 침대에서 생활한 지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그 위에서 자는 생활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척 자연스러웠으며 특별히 침대에서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다 얼마 전 고모가 집에 놀러 왔다가 갑자기 아버지에게 침대를 사주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고모에게 "침대?..

어느푸른저녁 2022.05.16

데이비드 빈센트, 《낭만적 은둔의 역사》, 더퀘스트, 2022.

도보는 사람들을, 특히 북적대는 집을 피할 가장 간단한 수단이었다. 동시에 강렬한 문학적인 경험이기도 했다. 산책자들은 한적한 곳에서 읽을 책을 소지해 다양한 도보 문학에 기여했다. 보행 속도는 자연과 인간이 만든 환경을 숙고하기에 이상적이었다. 한눈 팔지 않고 움직이는 시선은 걷는 곳이 들과 숲인지 도시의 거리인지 의식하지 않고 몰입하게 했다.(34쪽) * 혼자 걷기는 세상 체험에 좋은 도구로 합리화되기도 했다. 존 클레어에게 혼자 걷기는 아름답고 다양한 자연환경을 구경하고 반응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막히고 삭막한 도심 거리 산책은, 이방인들의 공동체인 19세기 도회지를 파악할 비법이었다. 이것이 도심 산책의 강점이자 한계였다. 도심의 익명성은 늘 매력적이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의 철학》에서 "끝..

새삼스럽다는 것

월요일의 늦은 오후.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숨 좀 돌릴 겸해서 밖으로 나왔다. 요즘은 출퇴근 길에 가로수로 심긴 이팝나무 꽃을 많이 보게 되는데, 사무실 주위에도 이팝나무가 몇 그루 심겨 있었다. 나는 이팝나무 그늘 아래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 하얗고 탐스러운 꽃을 들여다보았다. 푸르른 잎사귀 사이로 햇살이 비췄고 부는 바람에 나무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는데도 곤충의 여린 날개 같은 하얀 꽃잎은 떨어지지 않고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파르르 파르르 날갯짓을 해댔다. 나는 작년에도 보았을 그 꽃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삼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문득, 새삼스럽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 것인가 생각했다. 새삼스럽게 느껴진다는 것. 그것은 매번 반복되는 우..

어느푸른저녁 2022.05.10

푸르른 날

* 온통 푸르른 것들 속에 몸을 잠시 담그다 왔다. 생각보다 사람이 적어서 좋았다. 태양은 견딜만했고, 그늘에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평소보다 가벼웠다. 나는 조금 들뜬 기분으로 푸르름 속을 걸었다. 때때로, 선물처럼 아카시아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나를 감쌌다. 햇빛과 바람과 향기와 푸르름. 그 모든 것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날이었다.

어느푸른저녁 2022.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