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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산책으로 이끌었던 따스한 햇살과 바람처럼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투표장에 도착했다. 사전투표의 영향인지 아니면 원래 선거인이 적은 건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소독젤로 손을 소독하고 신분증을 제시하고 명부에 내 이름을 적은 뒤 투표용지를 받았다. 무려 열네 명의 후보가 나온 제20대 대통령 선거였다. 엄마 혹은 아빠의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투표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무어라 설명을 했고 아이들은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부모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이 무척 의미 있게 느껴졌다. 투표를 하고 집으로 바로 가려 했으나 날씨가 가만 놔두질 않았다. 투표장이 설치된 학교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입고 있는 패딩점퍼가 거추장스럽게..

어느푸른저녁 2022.03.09

더 배트맨

실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를 보고 싶었으나, 내가 사는 곳 그 어디에도 상영하는 데가 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린 뒤,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며 요즘 무슨 영화가 대세인가 보았다. 이 상영관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배트맨 캐릭터도 좋아해서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겠다 싶었다.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평일 오후의 상영관에는 나 이외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상영관 전체를 전세 낸 것 같은 기분으로 내가 예매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이전 영화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닌가 생각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느낌이 어땠냐고? 나는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영화의 긴 러닝..

봄날은간다 2022.03.07

그대 영혼 위에 뜨는 별

* 고모는 종종 내게 서점에 가서 책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렇게 산 책 중에 조정래의 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지금 집에 있는 10권의 태백산맥 중에 절반은 내가 심부름으로 사 온 것일 게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꽤 잘 나갔던 동네 서점에 들어가 태백산맥 5권 주세요,라고 쭈뼛거리며 말한다. 그러면 서점 주인은 책장에서 태백산맥을 꺼내 계산대 옆에서 책을 종이로 싸기 시작한다. 그때만 해도 책 표지를 종이로 싸주던 시절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서서 서점 주인이 책을 정성 들여 싸는 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짧다면 짧은 그 시간이 좋았다. 책이란 소중히 다뤄야만 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포장된 책은, 속에 책갈피를 품은 채 누런 봉투에 넣어져 내 손에 전달되었다. 나..

어느푸른저녁 2022.03.05

구부전(舅婦戰)

듀나의 『구부전』을 읽었다. 나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소위 SF 장르물을 거의 읽지 않는데, 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장르물에 익숙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공상과학이 다루는 여러 소재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듀나의 소설은 흥미가 생겨서 찾아 읽곤 한다. 지금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전에 『태평양 횡단 특급』을 읽었고, 소설은 아니지만 영화와 관련된 에세이인 『가능한 꿈의 공간들』도 좋았다. 때때로 에 올라온 영화 리뷰들도 즐겨 읽는다. 고정되고 편협한 관념을 뒤흔드는 상상력과 비타협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당연하게도 나는 그것들을 읽거나 보지 못했으므로)..

흔해빠진독서 2022.03.01

기형도를 읽는 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기형도, 중에서 * 기형도를 읽는 밤. 갑작스럽고도 정체모를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을까. 거의 잊고 있었던(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기형도를 꺼내 읽는다. 현재 진행형의 불안이 나를 감싼다고 언젠가 나는 썼다. 그의 불안으로 내 불안을 덮을 수 있을까. 우리는 각자 다른 불안의 내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기형도의 시집을 꺼내서 읽기 전까지 나는 알 수 없는 불안에 몸을 떨었다. 그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정말 오랜만이었고, 늘 그렇듯 적응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루 종일 내 몸 어딘가에 숨죽이며 잠복하고 있다가 내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내 영..

어느푸른저녁 2022.02.23

어떤 특정한 응시의 방식

나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길을 잃는다.(358쪽, 「브라질리아」)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나니 약간의 현기증이 인다. 길을 잃은 기분이다. 내가 제대로 왔는지 알 수 없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여긴 어디인가, 하고. 나는 머리를 살짝 짚은 후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표시해 둔 페이지를 다시 펼친다. 그것은 내가 가까스로 그녀를, 이 책을 이해해보기 위한 몸부림이다. 나는 그 문장들 속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자그마한 단서라도(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기 위해 주의를 기울인다. 그 문장들은, 그녀의 글 속에..

흔해빠진독서 2022.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