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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난다, 2021.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 깨고 나면 달콤했던 예전의 쓸쓸함이 아니고 쓸쓸함은 이제 내 머릿골 속에서 중력을 갖는다. 쓸쓸함이 뿌리를 내리고 인생의 뒤켠 죽음의 근처를 응시하는 눈을 갖는다.(13쪽) *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독毒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14쪽) * 배고픔만큼 강한 공감을 일으키는 것도 없다.(16쪽) * 그런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그러나 그들의 배고픔만큼이나 요지부동인 예술의 꿈 하나로 자존심을 버티면서, 그들은 몹시도 배고픈 밤이면 시장 뒷골목에서 쥐를 잡아먹고 살았다. 누가 믿겠는가. 서울 거리에서 누군가가 배가 ..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피에르 베르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중에서) * 저는 오래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당신께 전하는 안부입니다. 이런 것도 안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늘 그렇듯, 이 편지는 부치지 않을 것입니다. 부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나는 늘 당신을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부디 평온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나, 나는 곧 당신입니다." '부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편지'에 대해서 늘 생각합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아니라 부치지 '않는' 편지 말입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그것을 상대방에게 꼭 전달해야 한다는 간절함..

흔해빠진독서 2022.03.19

운 듯

* 조용한 일요일 오후. 식빵과 계란, 베이컨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창밖으로는 오랜만에 비가 내리고 있었고, 마치 안개의 숲에 들어선 듯 시야는 희뿌윰했다. 한낮인데도 비가 오고 흐린 날씨 때문인지, 나는 멜랑콜리한 고립감을 느끼며 커피를 내렸다. 집안에 퍼지는 은은한 커피 향기를 음미하는데 문득 이소라의 노래가 몹시 듣고 싶어졌다. 나는 살짝 기분 좋은 우울감으로 이소라의 6집이나 7집 혹은 아예 1집의 노래들을 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손은 상대적으로 많이 듣지 않은 이소라의 8집에 가 있었다. 새 앨범이 나오길 고대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나마 가장 최근의(무려 2014년에 나온!) 앨범에 손이 간 것을 보면. 이후에도 몇 개의 싱글이 나오긴 했지만 정식 9집 앨범은 아직 나오지 ..

오후4시의희망 2022.03.13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 한강, 《희랍어 시간》 중에서 * 하늘에서 끝없이 긴 문장들이 떨어진다. 온 세상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문장들은 저마다의 기억을 가진채 이 땅 위를 흐르고 흘러 결국 이야기라는 거대한 바다에 당도할 것이다. 정말 오랜만이로구나, 이렇게 긴 문장들은.

어느푸른저녁 2022.03.13

독毒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 이런 문장을 읽는다. "그런 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짓는 죄와 벌이지. 최선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 고통받은 뒤에야 그게 최악의 선택임을 알게 되는 것. 죄가 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벌이 죄를 만든다는 것."(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중에서) 또 이런 문장.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독毒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에서) 요즘 이런 문장들을 곱씹고 있다. 쓴 약을 씹어 삼키듯. * 아버지가 말했다. 지금은 시작이 아니냐고. 아직은 좀 지켜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나는 벌써부터 음험하고 사악한 기운..

어느푸른저녁 2022.03.11

피에르 베르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프란츠, 2021.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11쪽) * 당신을 살아 있게 했던 것,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달려온 불안에서 당신을 구해준 것 역시 다름 아닌 당신의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예술가는 오로지 창작을 통해서만 구원과 희망의 이유를 발견합니다.(14쪽) * 이 편지도, 앞으로 쓸 글들도 네가 읽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아. 그러나 상관없이 써볼 생각이야. 결국 혼잣말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말이지. 이 편지는 온전히 너를 향한 것, 우리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법이자 너에게 말을 거는 나의 방식이니까. 듣지도 답하지도 않을 너에게.(17쪽) * 작년과 똑같은 테이블에 앉아 네 생각밖에 하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