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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백

뭐랄까, 점차 사람들이 하는 말의 의중을 알 수 없어진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의 진심을 점차 파악하기 힘들다. 예전에는 그저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을 아무런 의심이나 계산 없이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그게 저 사람의 진심일까 의심하게 된다. 점차 사람들과의 대화가 어려워지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하고 싶은 말이 있기나 한건지, 대화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진실과 상반되는 말들에 시달려왔다. 상대방의 의중을, 말로 표현되지 않는, 그 너머에 혹은 그 이면에 있는 것들까지 내가 어찌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독심술사가 아니다. 나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사람들의 진심을 읽어낼 줄 아는 초능력자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내뱉는 표..

어느푸른저녁 2021.03.01

피곤이라는 병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피곤이다. 피곤의 질이 달라진 느낌이랄까. 이게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이라면 무척 슬픈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몸이 어딘가 좋지 않은 거라면 병원에 가봐야 할 일이 아닌가. 집안일과 업무 등이 겹쳐져서 무척 바쁘고 피곤한 날들을 보냈다. 피곤이란 늘 그림자처럼 내 곁에 머무르는 것이었지만, 지금껏 내가 알던 피곤과는 다른, 공격적이고 신랄한 피곤이었다. 나는 그 피곤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기력했고, 암울했고, 슬펐다. 몸의 피곤과 정신의 피곤이 나를 지배해서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해야했으며(그래서 과거와 달리 무척 힘들었으며), 소모적인 인간관계로 인해 고통을 당해야 했다. 어쩌면 내가 느낀 강렬한 피곤은 일보다는 ..

어느푸른저녁 2021.02.27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언젠가 내가 부산에 갔을 때, 부산만큼 다양한 얼굴과 표정을 가진 도시가 있을까 생각했었다. 내가 보고 온 것은 부산의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때 나는 어떤 아쉬움 혹은 안타까움을 느꼈던가? 아니면 부산이란 도시의 다양한 얼굴을 조금이나마 보고 온 것에 대해서 어떤 충족감을 느꼈던가? 어쩌면 그 모든 것, 아쉬움과 충족감을 동시에 느꼈던가? 그러한 감정과는 별개로, 지금 생각하니 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몇 번이고 방문한 부산이라는 도시의 아주 미미한 일면만을 보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관광 목적으로 간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내가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건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다였다는 것. 해운대의 바다와 모래사장 가까이 모여있는 호텔들, 술집들, 포장마차들, 자갈치 시장..

흔해빠진독서 2021.02.15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시간들을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에요.(50쪽, 박솔뫼, '매일 산책 연습' 중에서) * 파도는 깊은 물속에서 올라온 줄에 손목이 묶인 수억만 개의 손가락입니다.(92쪽, 김혜순, '해운대 텍사스 퀸콩' 중에서) * 환자가 집안에 있는 건 슬픈 일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 근저당이 잡히는 셈이었다. 죽음이라는 채무자가..

어떤 문장

이런 글을 읽었다. "떠나기 전, 유라는 나에게 일기장을 갖고 다니라고 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겠죠. 부산항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일기장 따위는 갖고 다닌 기억이 없다. 일기란 가장 일그러진 형태의 노출증이라고 생각한다. 일기를 쓰는 행위에는, 그 내용이 아무리 비밀일지라도, 누군가 읽을 것이라는 희망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그칠 줄 모르고 자신을 향내 내뱉는 소리나 혼잣말과는 다르다. 일기는 불완전한 상태의 자아가 그 순간에만 드러내는 최대치의 진실을 보여줄 뿐이다."(360쪽, 안드레스 솔라노, '결국엔 우리 모두 호수에 던져진 돌이 되리라' 중에서 -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또 이런 문장도 읽었다. "..

어느푸른저녁 2021.02.12

해피 투게더

그 영화를 본 것도 같고 안본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처음에 왕가위 감독의 가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새로이 개봉된다고 했을 때도, 그래서 요즘 시대에 영화관에서는 무슨 영화를 개봉하고 있나 궁금해서 인터넷 사이트 들어가보았을 때만 해도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만 있는 생활이 슬슬 지겨워져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과 마침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던 영화가 재개봉 되었다는 소식이 겹쳐져,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영화표를 예매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내가 정말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영화 속 장면들과 노래가 언젠가 한 번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생각은 ― 내가 이 영화의 예고편이나, 그동안 텔레비전의 숫한 영화 소개..

봄날은간다 2021.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