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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의 毒

이상한 날들을 지나고 있다. 어딘가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통증이 느껴지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지 알 수 없고, 간헐적으로 미미하게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어딘가 아픈가보다 생각되는 순간 통증은 사라진다.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알 수 없는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요즘은 자주 울컥거리거나, 말수가 줄어들고, 그래서 결국 어떤 슬픔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내 삶이, 내가 살아온 삶의 태도가, 방식이, 사고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건 무엇 때문일까. 왜 나는 이렇게 슬픈 걸까. 슬퍼지는 걸까. 책을 읽기도 힘들고, 어떤 생각에 몰두할 힘도 생기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앉아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일도 하기 싫고, 사람들을 만나는 건 더더욱 싫..

어느푸른저녁 2021.02.03

나는 하나의 노래를 가졌다

무대 위에는 나와 그, 그리고 제3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나와 그, 우리 두 사람은 객석에 등을 돌린 채 멀리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바닥에 요가의 연꽃자세로 앉아있다. 우리의 머리와 등은 꼿꼿하고 양 손은 양 무릎 위에 놓였다. 살짝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바다 위에는 거대하고 둥근 흰 섬광이 있다. 그것은 예외적인 구름이거나, 공중을 나는 흰 배이거나, 조용하게 정지한 폭발이거나, 비정상적으로 큰 새이거나, 시각적인 불안이거나, 지금 막 열린 어떤 미지의 문처럼 보인다. 우리는 정면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를 보지 않으면서 말하고, 그는 내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의 말은 서로 겹치고 뒤섞이며 구별되지 않는다. ..

요조, 『아무튼, 떡볶이』, 위고, 2019.

'아무튼'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앞 문장의 내용이나 흐름과 상관없이 화제를 바꾸거나 본래의 화제로 돌아갈 때 이어 주는 말.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지만, 아무튼 나는 이러이러하다 라고 말하는 것. 아무튼 이라는 말에는 다소의 조용하고 단호한 의지 같은 것이 엿보인다. 어찌되었든 결국 내 생각은 이렇다, 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출판사가 함께 펴내는 '아무튼' 이라는 제목의 에세이 시리즈가 있다는 걸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때 하루키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아무튼, 하루키'라는 책이 나온 걸 알게 되었고, 이 시리즈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 이 시리즈의 책을 읽게 된 건 '하루키'가 아니라 '떡볶이'였다. '아무튼, 하루키'를 구입하기 전에 '아무튼..

흔해빠진독서 2021.01.23

인간을 비추는 거울

인공지능 챗봇인 '이루다'의 서비스가 잠정 중단되고 데이타 베이스와 딥러닝 모델도 완전히 폐기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인공지능 '이루다'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은 바로 혐오였다. 나는 인공지능 챗봇이 혐오 발언을 했다는 것과 사람들이 이루다를 향해 쏟아내는 성희롱 발언들 사이의 간격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인간임이 한없이 부끄럽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로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구제불가능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차별은 사라지지 않고, 그런 세상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차별과 혐오의 언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자조적인 생각도 든다. 누군가 쓴 기사처럼, 이루다 사태는 우리 사회에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어느푸른저녁 2021.01.15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 비채, 2020.

사람은 누구나 많든 적든 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실태를 말로는 타인에게 잘 전할 수 없는 무거운 체험이 있고, 그걸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리라.(34~35쪽) *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06.

마치 오래전부터 그 책을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책들이 있지요. 한 번도 읽지 않았으면서 마치 그 책을 읽은 것처럼 생각되는 일 말입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책이 너무나 유명해서일 수도 있고, 그저 기억에 혼선이 생겨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가 쓴 에세이라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모른채, 어쩌면 제목 때문에 더 이끌렸을지도 모를, 을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기 오래 전에, '자기만의 방'이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또 '각자의 방'이라는 제목으로도 글을 썼었지요. 모두 다 제 어렸을 때의 이야기였어요. 유년시절 제 꿈은 저만의 작은 방을 가지는 것이었는데, 그 소망이, 아직 읽지도 않은 버지니아 울프의 이..

흔해빠진독서 2021.01.09

요조, 《아무튼, 떡볶이》, 위고, 2019.

나는 옛날 '미미네 떡볶이'에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것을 이제 영원히 먹을 수 없다. '분위기'말이다. 홀로 카페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거나, 홀로 책방에서 시집을 고를 때, 혹은 홀로 술집에서 생맥주 혹은 싱글몰트 따위를 홀짝일 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분위기' 하나를 같이 먹는다. 그 '분위기'를 먹으면서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이런저런 생각이라는 것을 하거나 혹은 그 어떤 생각도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며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그러고 나면 우리는 어찌 됐든 결국 더욱 자신다움으로 단단해진 채 거리로 나오게 된다.(14쪽) * 꽃나무가 주는 향기를 맡는 일은 나에게 간단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꽃나무는 가까이 다가온다고 해서 향을 더 나눠주는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바..

새해를 맞이하는 방식

늦잠이 유일한 낙이라는 건, 슬픈 일일까 아님 별 거 아닌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일까? 아무튼 나는 새해가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호기롭게 연휴동안 늦잠을 잤다. 잠을 늦게 자니 어쩔 수 없이 늦게 일어나는 것이겠지만, 어쩐지 내 늦잠에는 필사적이면서도 정신적인 몸부림이 잠재되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피로를 풀어보겠다는 무의식적인 의지의 표명 같은 것 말이다. 늦게 일어나니 당연히 하루가 짧을 것이고, 별로 하는 일 없이 하루가 빨리 지나가는 것 같으니 그게 아쉬워서 늦게까지 자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늦잠은 자고 싶은데, 일찍 자고 싶지는 않은 마음, 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나는, 잠을 많이 자고 싶은게 아니라 오..

어느푸른저녁 2021.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