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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을 권함』, 기파랑, 2011.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요즘 시대에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일본의 개화사상가이자 교육자였던 그가 학생들에게 들려줄 의도로 쓰인 이 책에 대해서 말이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발달하고, 모든 정보들이 넘쳐나고, 쉽게 퍼져나가는 시대를 살고 있는 21세기의 우리들에게 19세기의, 서양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시대의 동양의 한 지식인으로부터 어떤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을까? 삶의 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책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가 혹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 자신도 좀 의아했다.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에 나는 어떤 책에 대해서 쓸 때, 그 책이 어떤 의미 혹은 의의를 가지는..

흔해빠진독서 2021.04.03

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을 권함》, 기파랑, 2011.

속담에 "하늘은 부귀를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한 일에 준 것"이라는 말이 있다. 빈부나 귀천의 차는 하늘이 정해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떻게 일을 했는가에 따른 것이라는 의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 원래 귀천이나 빈부의 차이 같은 것은 없다. 학문을 닦아 세상 이치를 잘 알게 된 사람은 출세하거나 부자가 되고, 그 와 반대로 학문에 힘쓰지 않은 사람은 출세도 못하고 가난하게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21쪽) * 하늘의 도, 사람의 도에 따라 국제적인 교류를 갖고, 바른 도리에 기초해 아프리카 등 후진국 사람들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사과를 하고, 대의를 위해서는 영국이나 미국의 군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가 치욕을 당했을 때는 국민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목숨을..

윤광준, 『심미안 수업』, 지와인, 2018.

"예술이 뭐야?" 동생이 전화를 걸어 나에게 묻는다. 동생은 갑자기 예기치 않은 시간에 예기치 않은 용건으로 불쑥 전화를 하곤 했다. 오랜만에 전화를 하든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고, 그 흔한 안부 인사는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간단히 묻는 것이다. 마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듯, 생각이 날듯 말 듯하다는 듯, 아... 그게 뭐였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이런 식의 전화가 당황스러웠으나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번에는 어떤 걸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을까 살짝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늘 내 예상을 벗어나는(아니,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질문에 나는 매번 당황하고 만다. 예술이 뭐냐니.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나는 익숙한 당황스러움을 누르고 동생에게 ..

흔해빠진독서 2021.03.28

사람이 하는 일

* 박상영의 소설집인 라는 특이한 제목의 책이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나는 책의 첫 페이지를 읽다가 관둔다. 도무지 읽을 의욕이 일지 않는다. 책이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아직 책의 첫 페이지도 다 읽지 않았으니까. 어제 윤광준의 을 다 읽었다. 무언가를 쓰고 싶은데 아직 쓸 의욕이 일지 않는다. 읽고 싶은 의욕도, 쓰고 싶은 의욕도 없이, 나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그저 무슨 책을 읽었고, 앞으로 무슨 책을 읽을 것이라는, 일기도 뭣도 아닌, 그저 그런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건 도대체 무엇일까? * 저번 달에 사서 읽고 있었던 책을 반품했다. 책의 반 정도 읽다보니 앞서 읽었던 문장들이 반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그런가보다 하고 계속 읽어나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정말..

어느푸른저녁 2021.03.15

윤광준, 《심미안 수업》, 지와인, 2018.

딜레탕트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딜레타레로 '기쁘게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기쁨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는 것이다. 예술 애호가로 살면서 느낀 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도 모두 의식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내가 의미를 둔 것만이 나에게 그 미적인 감흥을 허용한다. 명화도 명곡도, 일상의 작은 연필 하나까지도 그렇다.(12쪽) * 감상은 단순히 '본다'는 것을 넘어선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어떤 판정을 내리는 것은 쉽게 잊히는 특징이 있다. 그것보다 더 새롭고 대단한 자극을 받으면 그 이전의 기억이 무력해지는 것과 같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일방적 수용이라면, 예술의 아름다움은 자신이 개입된 적극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때문..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보고 있으면 나른해지는, 뱀파이어 영화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무려 아담과 이브다. 수천 년을 살았음직한 뱀파이어들. 이 영화에서 뱀파이어는 하나의 은유로 쓰인다. 인간에 대한 혐오(아담은 인간들을 '좀비'라고 부른다)와 예술에 대한 찬미. 뱀파이어들이 오래 살면 그 두 가지만 남게 되는 것일까? 듀나의 말처럼, '이 영화의 나른한 탐미주의는 빈약한 스토리를 덮기 위한 위장이 아니라 내용 자체'로 보인다. 듀나는 그것을 '자뻑'이라고 표현했는데,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것을 마치 즐기는 듯하다. 지루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 또한 그들의 자뻑을 나름 즐긴 탓이리라. 나른하고 우아하며 아름답고 때론 고결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들도 결국 본능 앞에서 어쩔 수..

봄날은간다 2021.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