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994

처음 만나는 대화

세상은 코로나로 들썩이고, 사람들이 사라진 거리는 조용하다못해 을씨년스럽지만, 내게는 나름 떠들썩한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여러 우연들이 겹쳐서 조금은 특별한 크리스마스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족들과 보낸 크리스마스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블랙 타이거 새우를 구입했고,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하나씩 샀으며, 케익도 샀다. 동생의 생일이 연말이기도 했고, 마침 크리스마스에 온다고 하길래 생일 축하겸 크리스마스 파티 겸, 송년회를 하게 된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를 두고 하는 발언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혹은 의례적으로 하는 발언이라는 것은 때로 지나치거나 불필요한 격식처럼 느껴져서 공식적인 자리 외에 가족끼리 있을 때는 잘 안하게 되는데, 어쩌면, 가족끼리 있을 ..

어느푸른저녁 2020.12.26

멀리 있지만 가까이 있고, 가까이 있지만 멀리 있는

겨울, 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이제 완연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겨울인지, 가을의 잔상인지 혹은 꿈 속인지 알 수 없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묻고 싶지만, 그마저도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릴 수 있을 때에야 입 밖으로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니, 이런 저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제가 말을 실수했군요. 저도 저를 이해할 수 없는데, 누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저를 이해해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요구일테니까요. 어쨌든 온통 갈색과 회색빛의 겨울의 통로에서 당신은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정말 오랜만의 안부라 제 자신도 얼떨떨할 정도이니, 제가 횡설수설 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어느푸른저녁 2020.12.12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06.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견해로는 여성의 진정한 본성과, 픽션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크나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 문제의 결론에 도달해야 할 의무를 회피했고 따라서 나에게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는 셈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라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방과 돈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최선을 다해 보여주겠습니다.('자기만의 방', 10~11쪽) * 상상에 있어서 여성은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

뉴 뮤턴트

* 개봉하기까지 무척이나 사연이 많은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개봉일이 계속 미뤄지는게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심지어 극장에 걸리지도 못하는게 아닌가 하는 루머도 돌았으니), 개인적으로는 어벤져스 시리즈보다는 엑스맨 시리즈를 더 좋아하는데다, 예고편도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이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루머와 개봉 후 들었던 혹평에도 불구하고 내심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코로나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9월에 개봉했을 때는 반갑기까지 하였는데, 극장에 가서 볼 기회를 놓쳐서 나중에 VOD로 풀리겠거니 생각하며 잊고 있던 차에 올레TV에 이 영화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망설임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이런걸 시간의 혜택이라고 해야할까? 지금으로서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와 불안감 등의 감정들이 다..

봄날은간다 2020.11.21

고요하지만 격렬한

* 그곳에 도착했을 때, 오직 들리는 것은 부는 바람과 저수지 위에 무리지어 있던 오리떼의 울음소리 뿐이었다. 웅웅거리는 바람소리가 주위를 에워싼 산을 지나 저수지를 훑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 나에게 와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거대한 고요였을까?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천천히 이육사 문학관을 향해서 걸었다. 뒤에서 오리떼의 울음소리와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 소리들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매표소 직원에게 그만 '이곳은 정말 조용한 곳이로군요!' 라는 말을 무심결에 하고 말았다. 직원은 웃으며 '이곳은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니까요.' 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고요하다는 말인가? 그가 이렇듯 고요한 곳에서 태..

토성의고리 2020.11.08

윌리엄 버로스, 『정키』,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마약이 세포의 방정식이요,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 사람. 처음으로 마약 중독자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윌리엄 버로스라고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를 졸업하고 사립 탐정, 해충구제업자, 바텐더, 신문기자 등 여러가지 일을 한 특이한 이력의 작가. 이 책은 본인이 마약에 빠지게 된 경위와 마약을 끊고 다시 시작하게 되는 상황 등을 무덤덤하게 그린 자서전이었다. 작가가 마약에 빠지게 된 시기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내가 짐작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암울하고, 반항적이며, 전복적인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윌리엄 버로스 자신은, 당시의 안정적이고 부유한 생활이 위선적이고 거짓으로 가득한 허위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끊임없이 마약..

흔해빠진독서 2020.11.01

독서의 이유

* 방금 전에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나갔다 왔는데, 추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을을 느낄 새도 없이 겨울이 온 것 같다. 아직 단풍이 절정이 아닌 것 같은데. 올 가을은 늘 그랬듯, 왔는가 싶으면 어느새 가고 없다. 속절없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낙엽은 지고 있고, 산은 점차 울그락불그락 물들고 있다. 나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것이고, 내 보이지 않는 낙엽들도 무수히 떨어질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 지속적인 야근으로 계절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문득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하는, 요즘말로 현실 자각 타임, 즉 현타가 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내 사생활 사이의 균형이 심각하..

어느푸른저녁 2020.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