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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버로스, 《정키》,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종종 들리는 질문이 있다. '왜 마약 중독자가 되는가?' 답은 '스스로 중독자가 되려는 사람은 없다.'이다. 하루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마약중독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은 없다. 정말 중독되려면 하루 두 번씩 적어도 석 달은 마약을 써야 한다. 나는 처음 습관성 중독이 되기까지 거의 반년이 걸렸다. 그때에는 금단증세도 가벼웠다. 중독자가 되려면 1년 가까이 수백 방의 주사를 써야 한다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물론 이런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애당초 왜 마약을 시작했나? 왜 중독자가 될 만큼 오래 사용했나?' 다른 어디에도 강한 동기가 없으므로 마약 중독자가 된다. 마약이 당연히 이긴다. 나는 호기심에 시작했다. 돈이 있었고, 별생각 없이 주사를 맞으러 다닌 것뿐이다. 결국 중독됐다. 나와 이야기..

뮬란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다. 물론 영화관에 가서 본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가 이었는데, 올해 초에 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오래 전에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집에서도 최근에 개봉한 영화들을 볼 수 있으니 굳이 갈 마음도 들지 않는다. 물론 극장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보는 것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의 경우, 처음에는 극장에서 보고 싶었으나, 집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 극장에 안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봉 전 많은 구설에 올랐던 영화이기도 하고, 개봉하고 나서도 그리 평이 좋지 않았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많이 실망스러웠다. 정말 오래 전에 보았던,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애니메이션 이 훨씬 나았다는 생..

봄날은간다 2020.10.10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상상. 그것을 글로 쓴 것이 결국은 소설이 아닐까. 김연수의 오랜만의 장편소설인 을 읽었다. 나타샤와 당나귀와 흰 눈을 좋아하는,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한 사람, 바로 백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해방 이후 북에 머무른 그였기에 북에서의 행적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은데, 작가는 바로 그 시절의 백석에 대해서 상상한다. 그 상상의 결과물이 바로 이 소설이다. 하지만 머릿속 상상으로만 소설이 탄생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백석에 대해서 쓰자면, 일단 백석과 관련된 여러가지 사료들과 사건 등을 바탕으로 소위 취재라는 것을 해야만 했을 테니까. 그렇게 한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들을 바탕으로 작가는 백석의 어느 한 시절을 구상해내고, 그 공간..

흔해빠진독서 2020.09.29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의 고조할머니, 그러니까 아버지의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의 할머니 산소에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오래 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와 내 사촌동생들, 아버지의 형제들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추석이면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갔었다. 가는 길이 꽤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나와 사촌들은 차도 타지 않고 걸어서 갔다. 그저 가족들과 어딘가를 간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노랗게 익은 벼와 감나무, 대추나무를 보는 것이 좋았으며, 잠자리나 여치 등을 잡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갔지만, 산소까지 가려면 산을 올라가야만 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아무런 불평없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산을 올랐다. 그때는 산이 무척 험하다는 생각을 했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을 가는 것..

어느푸른저녁 2020.09.19

자우림 - Seoul blues

* 오늘 운전을 하면서 어딘가를 가던 중에 틀어놓은 USB 음원에서 자우림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자우림의 6집 앨범인 였다. 자우림의 6집을 음원으로만 가지고 있었기에, 타이틀 곡의 제목 외에는 앨범 안의 노래들의 제목을 모른 채로 그저 듣기만 했었다. 언젠가, 어느 지면에선가 자우림 6집이 대체적으로 혹평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차 안에서 듣는 자우림의 6집은, 그저 말없이 좋기만 했다. 요즘 울적한 기분 때문에 한없이 아래로만 가라앉는 듯 느껴졌는데, 자우림의 6집은 그런 내 울적함을 배가시켰다. 앨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허무함, 우울함이 요즘의 내 기분과 맞물려 더욱 울적한 기분이 들었으나, 또 이상하게도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차 안에서 듣다가 집으로 와서 6집 앨범의 노래 제목들..

오후4시의희망 2020.09.12

태풍이 지나간 자리

태풍이 지나갔다. 다행히 내가 있는 이곳은 바람도, 비도 많이 내리지 않았다. 어제 숙직을 하여 오늘 오후에 일찍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에 있었던 오전 내내 머리가 멍하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계속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다음 주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번 주에 준비도 해야되고 정리도 해야했지만, 오늘 오후만큼은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었다. 그동안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제법 길어서 집에 가기 전에 미장원에 들렀다. 머리를 자르기 전에 마트에 들러 장도 좀 봤다. 요즘 계속된 야근으로 인한 피로로 집에 가면 쓰러져 자기 바빴는데, 오늘 모처럼 장도 보고 머리도 자르니 기분전환이 되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내리던 비가 그치고 바람이 선선히 불어와서 피로가 조금이나마 씻겨나가는 듯했다. 머리를 자르기 ..

어느푸른저녁 2020.09.07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이건 마치 항상 기뻐하라고 윽박지르는 기둥서방 앞에 서 있는 억지춘향의 꼴이 아니겠나. 그렇게 억지로 조증의 상태를 만든다고 해서 개조가 이뤄질까? 인간의 실존이란 물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흐름이라서 인연과 조건에 따라 때로는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며 때로는 호수와 폭포수가 되는 것인데, 그 모두를 하나로 뭉뚱그려 늘 기뻐하라, 벅찬 인간이 되어라, 투쟁하라, 하면 그게 가능할까?" 준은 말을 끊었다가 이번에는 우리말로 돌아왔다. "이런 상황이라면 결국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시바이(연극, 속임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게 개조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 시바이를 할 수 있다면 남고, 못한다면 떠나라. 결국 남은 자들은 모두 시바이를 할 수밖에 없을 텐데, 모두가 시바이를..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사진의 용도』, 1984BOOKS, 2018.

저녁 식사 후에 치우지 않은 식탁, 옮겨진 의자, 전날 밤 섹스를 하다가 아무 데나 벗어던져 엉켜 버린 옷들, 나는 줄곧 우리 관계의 시작부터 잠에서 깨어나 그것들을 발견하며 매료되고는 했다. 매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각자가 물건을 줍고 분리하며 그 풍경을 허물어뜨려야만 하는 일은 내 심장을 옥죄었다. 단 하나뿐인, 우리들의 명백한 쾌락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 날 아침, M이 떠난 후 잠에서 깨어났다. 계단을 내려와 햇살 속에서 옷가지들과 속옷, 신발이 복도 타일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욕망과 우연이 낳은, 결국 사라져 버릴 이 배열을.(9쪽) 그리하여 그녀는 사진을 ..

흔해빠진독서 2020.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