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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피

내 가족은 이글거리는 태양을 닮았다. 아니다. 그보다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용암을 닮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평소 느꼈던 가족들에 대한 불만과 서로에게 받았던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서 더이상 쌓아놓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그 순간은 전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폭발하고 마는 것이다. 연휴 동안 모처럼 가족들과의 모임에 즐거워야 할테지만, 우리들은 그 짧은 시간조차도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고야 말았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어이가 없었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눈물을 흘렸다.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하는 말은 그게 아니야!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너는 ..

어느푸른저녁 2020.08.17

지붕 위의 소

지붕 위에 올라간 소들을 지상으로 내리기 위해 크레인이 동원되었다. 긴 줄에 매달린 소들은 허공에 잠시 띄워졌다가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어떤 소는 몸을 감았던 줄이 풀어져 목만 대롱대롱 매달린 채 허공에 떠 있어야 했다. 그 모습은 마치(물론 그것은 소를 살리기 위한 일이었지만) 교수형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지상으로 내려온 소들은 네 발로 서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인지, 소들은 땅에 내려와서도 쓰러지듯 몸을 땅에 기댄 채 기운이 나기를 기다려야했다. 소들의 얼굴에는 지쳐보인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마치 영혼이 잠시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이 서려있었다. 애초에 소들이 지붕 위에 올라간 이유도 폭우로 인해 급류에 휩쓸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거대한 물살에 휩쓸린 상황을 상상할 수..

어느푸른저녁 2020.08.11

문제는 인간

비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린다. 이제 그쳤나 싶으면 다시 오고, 그만 좀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텔레비전에는 연일 수해가 난 지역의 피해 상황과 앞으로 올 강수량을 예측하는 특보들로 가득하다. 아직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에는 큰 피해가 없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전국적으로, 아니 전 세계적으로 많은 비 때문에 사람들이 신음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남일 같지가 않은 것이다. 아직도 일부 지역에는 호우경보가 발령 중이고, 비는 여전히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다.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이 비가 이제는 좀 그쳤으면 좋겠다. 물론 비는 누군가의 노여움으로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누군가를 증오하기 위해 내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기상상..

어느푸른저녁 2020.08.08

조해진, 『빛의 호위』, 창비, 2017.

한 권의 책을 읽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과연 그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까, 아님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까.(그 둘은 결국 같은 것일까?) 원래부터 무언가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그때그때 기록해놓지 않으면 좀처럼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래 전에 적어놓은 글이나 찍은 사진들을 봤을 때, 망각의 숲을 헤치고 올라가 겨우겨우 당시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과거의 한 시절은, 오로지 내가 써놓은 짧은 글이나, 누군가의 사진 속에서만 겨우, 미미하게 살아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은 뭐랄까, 슬프다기 보다는 좀 덧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때 내가 읽었던 것, 그때 내가 본 것은 다 무엇이었..

흔해빠진독서 2020.08.01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사진의 용도》, 1984BOOKS, 2018.

저녁 식사 후에 치우지 않은 식탁, 옮겨진 의자, 전날 밤 섹스를 하다가 아무 데나 벗어던져 엉켜 버린 옷들, 나는 줄곧 우리 관계의 시작부터 잠에서 깨어나 그것들을 발견하며 매료되고는 했다. 매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각자가 물건을 줍고 분리하며 그 풍경을 허물어뜨려야만 하는 일은 내 심장을 옥죄었다. 단 하나뿐인, 우리들의 명백한 쾌락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 날 아침, M이 떠난 후 잠에서 깨어났다. 계단을 내려와 햇살 속에서 옷가지들과 속옷, 신발이 복도 타일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욕망과 우연이 낳은, 결국 사라져 버릴 이 배열을.(9쪽) * 나의 첫 반응은, 옷..

잊혀졌거나, 잊혀지는 중이거나, 잊혀질 예정인

* 예전에 페소아의 를 읽으면서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다시 읽어본다. 제일 마지막 쓴 글이 2017년 11월이니까 그로부터 벌써 2년이 훌쩍 지났다. 그 두툼한 책을 오래도록 천천히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발췌하여,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적은 것인데, 지금 읽어보니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기만 하다. 페소아의 글도 그렇고, 내 생각도 그렇고. 내가 쓴 문장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존재 자체가 이미 망각', '우리는 잊혀졌거나, 잊혀지는 중이거나, 잊혀질 예정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라는 문장. 내 머릿속에서 나온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문장이 무척이나 생경하고,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런 문장을 썼던가? 의아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때는 아마도 페소아의 문장들에 스며있..

어느푸른저녁 2020.07.24

하루키식 자기 앞의 생

고작 일주일 하고도 3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시간 깊은 동굴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꿈인가, 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여전히 축축하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시커먼 동굴 속임을 확인하고는 절망에 빠지곤 했다. 어쩌면 동굴이 아니라 같은 장소를 계속 반복해서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두웠으므로, 그곳이 동굴인지, 아니면 단순히 나를 가둔 지하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제는 7월부터 맡게 된 새로운 업무로 인한 피로가 누적되어 정말 쓰러질 것 같았다. 누군가 조금만 툭 건드려도 픽, 하고 쓰러져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이젠 피로가 회복되는 시간이 더뎌지고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아침부터 내린 비 때문에 잔뜩 흐린 날씨와 어우러져, 오전 내내 몸과 마음을 ..

어느푸른저녁 2020.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