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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이제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하긴 벌써 5월의 마지막 날이고 곧 있으면 6월의 첫 날이 된다. 지금은 장미의 계절이지만, 장미보다 더 많이, 더 쉽게 보이는 것이 금계국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밖으로 나가면 길 가에 온통 노란 금계국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코스모스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꽃은 올해 유난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어디를 가더라도 눈에 띄는 그 꽃을 볼 때마다 누군가 작정이라도 한듯 도로마다 한 움큼씩 씨를 흩뿌려 놓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도 아버지와 함께 회룡포 마을로 가는 길에 본 노란 금계국이 장관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리던 노란 빛의 파도. 원래 어제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으나 받지 못했다. 평소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놓아서 종종 받지 못하는..

어느푸른저녁 2020.06.01

코맥 매카시, 『로드』, 문학동네, 2008.

제목처럼 단순하고 간결한 이야기이지만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다. 모든 것들이 폐허가 되고 난 이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상황에 놓여야 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모든 산과 집들이 타고, 재가 되고, 문명의 모든 혜택들과 이기들이 파괴되고, 심지어 인간의 존엄마저 지킬 수 없는(그런 말 자체가 사라져버린), 오로지 산 자와 죽은 자만이 존재하며, 산 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잔혹한 디스토피아의 세계. 그런 세계 속에서 주인공인 남자와 그 아들은 폐허가 된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길은 오로지 검은 재로 뒤덥혀 있고, 먹을 것을 찾아 불에 타버린 집을 뒤져야 하며, 혹 다른 사람들에게 먹힐까봐 늘 총을 지니고 다녀야 하는, 무법과 야생, 공포와 추위로 가득한 허허벌..

흔해빠진독서 2020.05.24

마음의 행방

블로그가 바뀌었다. 정확히는 블로그 디자인 혹은 기능이 바뀌었다고 해야할까? 나는 이 블로그를 오래 전부터 이용해 왔고, 특별히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래 전 '다음'에서 만든 '플래닛'이 사라지고 블로그로 옮겨올 때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번에도 그냥 그렇게 새로운 블로그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곳을 그저 내 개인 일기장 정도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어떤 형태의 블로그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이번의 새로운 변화도 내겐 그저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이 어떻게든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이번에 새로 바뀐 블로그에 적응하는 것도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바뀐 블로그에 어리둥절해했지만..

어느푸른저녁 2020.05.19

코맥 매카시, 《로드》, 문학동네, 2008.

네가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들은 거기 영원히 남는다는 걸 잊지 마. 한번 생각해보렴. 남자가 말했다. 어떤 건 잊어먹지 않나요?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17쪽) 전 같으면 들어가지 않았던 숲이 되어버린 집의 잔해를 손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지하실의 검은 물에 쓰레기와 녹이 스는 관과 함께 둥둥 떠 있는 시체 한 구. 남자는 천장의 일부가 타버려 하늘을 향해 뻥 뚫린 거실에 서 있었다. 물 때문에 뒤틀린 판자들이 마당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서가의 물 먹은 책들. 남자는 한 권을 꺼내 펼쳤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모든 것이 축축했다. 썩어가고 있었다. 서랍에서 초를 하나 발견했다. 불을 붙일 방법은 없었다. 남자는 초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리가 두려워 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혐오와 비난, 저주의 말들이 쏟아진다. 마치 욕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혹은 상대방을 죽일듯이 욕을 퍼부어야만 기분이 풀린다는 듯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거친 말들을 쏟아낸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마땅하나, 그것이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넘어 인신공격으로, 혹은 잘못과는 상관없는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향에 대한 비난과 혐오로, 더 나아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집단적인 비난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집단적인 광기와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왜 주술적인 광기에 휩싸여 본질과는 다른 것들을 향해 비난과 혐오의 말들을 퍼붓는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보이지 않는 두려움으로 인해 누군가를, 잘못..

어느푸른저녁 20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