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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빛의 호위》, 창비, 2017.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병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권은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기상점의 쇼윈도우에 반사되는 햇빛이 오직 그녀만을 비추고 있었다.(32쪽, '빛의 호위' 중에서) * 높은 곳에서 새벽의 M시를 내려다본다면, 형광등의 창백한 빛에 둘러싸인 편의점은 네모난 모양의 부표처럼 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곤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안전하면서도 풍요로운 영역이 ..

빠리 거리의 점잖은 입맞춤

어느덧 이천이십 년 유월의 마지막 토요일이다. 7월 1일자 인사이동으로 인해 우리들은 이맘 때만 되면 늘 그랬듯, 송별회를 몇 차례씩 했다. 가는 사람들은 잘 있으라는 인사를 몇 번이고 해야했고, 가지 않는 사람들은 잘 가라는 인사를 몇 번이고 해야했다. 나는 가지 않는 사람쪽에 속해 있어서, 가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잘 가라고 말했고, 그들은 나에게 잘 있으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인사발령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해야하는 이런 행사가 어쩐지 불필요하다 생각되기도 했고, 그동안 함께 있었던 동료에 대한 마지막 예우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기도 했다. 그렇게 어수선한 유월이 가고 있다. 나는 '가지 않는 쪽'이지만, 사무실 내에서 자리를 옮겨야 할 처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가 당연..

어느푸른저녁 2020.06.27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경주에 있는 황리단길을 다녀왔다. 유명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다. 이번에 기회가 되어 가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그 규모가 커서 놀랐고, 주차할 때가 없어서 또 한 번 더 놀랐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거리는 젊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좁은 골목길로 이루어진 마을은 당연하게도 찾아오는 사람들의 그 많은 차를 감당해낼 여력이 없었다. 나는 그 동네를 몇 번이나 돌고 나서야 겨우 좁은 골목길에 주차할 공간을 찾아냈다. 주차하는데 온 기력을 쏟기도 했고, 날씨도 더워서 걷기가 힘들었으나 그래도 힘을 내어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말로만 듣던 황리단길은 사진 찍기 좋은, 작고 예쁜 가게들이 즐비하고, 먹을 것과 소소하게 살 것들이 많아서 제법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얼마전부터 지자..

어느푸른저녁 2020.06.21

김명인, 『내면 산책자의 시간』, 돌베개, 2012.

순전히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김명인의 런던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은 대학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이며, 계간지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명인이라는 사람의 6개월 간의 런던 생활 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저자의 이름만 보고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시인을 떠올렸으나, 그 예측은 빗나갔다. 하긴 김명인이라는 시인의 시도 읽어보지 못했고, 김명인이라는 교수의 문학평론도 읽어보지 못했으니 나는 그 두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하지만 처음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먼저 시인의 이름을 떠올렸으니,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시인 때문에 역시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교수의 산문을 읽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이건 뭔가 좀 이상한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보다 앞..

흔해빠진독서 2020.06.13

온 우주의 문을 열어 너에게 갈께

가 오늘 끝났다. 인기를 끌었던 와 이후 나온 김은숙 작가의 기대작이었는데, 전작들만큼의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대체로 호평보다는 혹평이 많은 것 같다. 평행세계라는 소재를 끌어와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전작들에 비해 로맨스가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개연성이 없다는 등의 불평이 많은 것이다. 급기야 와 비교하는 기사까지 보고 나서, 나는 의아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결국 재미가 없다는 말인가? 그런 비판들에 대해 일부 수긍을 하면서도, 그래서 결국 재미가 없다는 말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아니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김은숙 작가의 작품들을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고, 거의 다 챙겨보는 편인데, 유독 그리도 유명했던 를 보지 못했다(왜 그랬을까?). 를 보지 못했기 때..

어느푸른저녁 2020.06.13

김명인, 《내면 산책자의 시간》, 돌베개, 2012.

나에게는, 말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와 상호부조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관계의 얽힘을 기피하는 이중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불편하고 힘들면 손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런 식의 '신세짐'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보다는 나의 이러한 얄팍한 이중성 앞에 직면하는 일이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라는 '선한' 이념과, '신세'라는 말에서 풍기는 어딘가 '편법적인' 분위기 사이의 분열. 또 기꺼이 신세를 지는 뻔뻔함과, 얽히는 것을 기피하는 개인주의 사이의 분열. 이런 것들이 어정쩡하게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결국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뭔가 몰의식적인 상태로 빠지는 것이 무엇보다 힘겨운 것이다. 자립도 연대도 아닌, 고독도 의존..

한 시절, 내 몸의 일부였던

지난 목요일에 안경을 새로 맞췄다. 퇴근 시간을 한 시간도 채 남겨놓지 않고, 화장실에 가다가 마스크를 잠시 벗는다는게 안경까지 같이 벗겨지면서 땅에 떨어졌고, 안경테가 깨진 것이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잠시 생각해야했다. 뿔테를 끼고 있었는데, 어떻게 정중앙의 연결부분이 딱 부러졌는지 신기했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안경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내 몸의 일부처럼 착용하던 안경이 갑자기 깨져버리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심정이 되었다. 동료들에게 5초 본드가 있는지 물었고, 스카치테이프로 잠시라도 보수를 해보려고 했으나, 본드도 찾지 못했고, 스카치테이프로도 붙여지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자신이 퇴근할 ..

어느푸른저녁 2020.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