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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바보같이 굴거나 어쩔 줄을 모르거나 혹은 뭔가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생을 살면서 그런 불운한 경우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내면의 낙천적인 빛을 발휘하여 그것이 불행이 아니라 일종의 여행병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 세계의 여행자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우리는 무와 무 사이를 혹은 전체와 전체 사이를 여행하고 있다. 우리는 어차피 길 위에 있는 것이니 도중에 만나게 되는 이런저런 불편, 혹은 고르지 않은 길바닥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 위로를 주는 요소는 정말로 많다! 맑고 청명하며, 언제 봐도 구름 한두 점이 흘러가고 있는 저 멀리 푸른 하늘, 숲 속에서는 단단한 나뭇가지를 흔들고 도시에서는 5, 6층에 널린 빨래들을 펄럭이게 하는 가벼운 바람, 날이 따뜻하면 따뜻함이,..

불안의서(書) 2017.06.03

황정은,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병신 같은 건 싫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마지막에 병신 같은 걸 남기고 죽는 건 싫다. 걱정이 될 테니까 말이다. 세상에 남을 그 병신 같은 것이.(「양의 미래」, 43쪽) *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계절의 공기가 신선하게 폐를 부풀렸다. 싸늘하고 맑은 날이었다. 덧옷의 성긴 올 사이로 찬바람이 들었는데 햇볕은 따뜻해서 바람만 아니라면 어디 모퉁이에 앉아 있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햇볕을 쬐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할 뿐. 내가 어렸을 때는…… 하고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동네 모퉁이에 그렇게 앉아 있는 노인들을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눈도 부실 텐데 노인네들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데 앉아 있는 걸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그 사람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