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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16.

취향공동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걸 말한 사람은 요즘의 소비 트렌드에 대해서 말하면서 취향공동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주제는 생각나지 않는 어떤 강연에서였다. 프로젝터를 통해 보여 진 화면에 몇 개의 키워드가 나열되어 있었고, 나는 그걸 수첩에다 받아 적었다. 나는 무슨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 특별히 거부감도 없지만, 특별히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나는 어떤 면에서 공동체적인 삶(그런 게 있다면) 보다는 개별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동체라는 말에는 일종의 신비하면서도 주술적인 기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맥락 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말하리라. 개별적인 삶들이 모여서 공동체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냐고. 우..

흔해빠진독서 2017.03.03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16.

험윤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만든다. 그가 커피를 만드는 방식은 매우 간단하다. 모든 종류의 커피머신을 싫어하는 그는 극도로 곱게 간 커피 가루를 스푼 가득히 세 번 커다란 잔에 담고 가스불로 펄펄 끓인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붓는다. 가루가 대부분 잔 바닥에 가라앉을 때까지 오 분 정도 기다린다. 그리고 두어 모금 정도 마신다. 커피는 충분히 진하지만 그 사이 식어 버렸으므로 아주 뜨겁지는 않다. 당연하게도 항상 약간의 커피 입자가 입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입안에 미세한 깔깔함이 항상 남아 있다. 험윤은 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가루가 가라앉기를 헛되이 기다린다. 하지만 검은 진흙처럼 끈끈하고 고운 커피 입자는 완전히 가라앉는 법이 없다. 충분히 무겁지 않은 미세한 입자들 일부는 잔 전체를..

어떤 비참

나는 이 글을 1월 12일부터 쓰기 시작해서 2월 3일까지 썼다.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내가 내 일상에 대해서 쓰듯 그렇게 나에 대해서, 내 주위의 사물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집에서 혼자 이런 쓸데없는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비참하다 생각되기도 했는데, 그건 그때 읽은 정지돈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하루하루 조금씩 글을 이어서 쓰다보나 생각보다 조금 긴 글이 되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쓸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또한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런 식으로 이 무의미한 생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곳에서 당분간 지내게 되었다. 원래 지내고 있던 직장의 사택이 공사를 시작했기 ..

어느푸른저녁 2017.02.19

먼 북소리

일어나 보니 반나절이 지나가 있었다. 12시 넘어 일어나서 식빵에 계란물을 입혀 토스트를 해 먹고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책을 읽었다. 하루키의 를 읽고 있는데, 여행 에세이라서 그런지 불현듯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핸드폰에 저장된 몇 달 전 일본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들춰보았다. 흔히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남는 건 사진이지만 사진은 결코 그때의 기분과 느낌을 온전히 전달해주지 못한다. 남는 건 결국 어떤 기억 혹은 느낌인데, 그건 사진만으로 불러오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다. 물론 사진을 봄으로써 어떤 기억을 환기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좀 더 복잡 미묘한 상황이나 느낌은 어쩌면 글로 ..

어느푸른저녁 2017.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