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선의 법칙》, 문학동네, 2015.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 벗어나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던, 벗어나 도달한 곳이 다시 벗어나야 할 곳이 되던 시절, 밤과 낮이 같고 여름과 겨울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같은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과 별다르지 않았다. 당시는 그걸 몰랐다. 생의 가장 .. 기억할만한지나침 2015.12.20
이기호, 「아이도스」, <Axt>, 9/10월호, 2015. 나는 지금 여기에 가급적 감정이 배제된, 그것이 비록 앙상한 모습일지라 하더라도, 사실로써 확인된 이야기들만 적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애초 나의 의지였다. 하지만 나는 법이니 사회과학이니 하는 것들도, 말하자면 감정 배제의 원칙 위에 세워진 것들 또한 혐오나 모멸, 수치심.. 기억할만한지나침 2015.11.09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창비, 2014. 뭘 하며 걸었어? 라고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애자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야기했지,라고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기억나는 것이 없느냐고 재차 묻자 그건 .. 기억할만한지나침 2015.09.09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난다, 2013.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나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12쪽) * 드라마가 역사를 앞에 내세울 때는 그 역사.. 기억할만한지나침 2015.08.25
배수아, 「1979」, <AXT> 7~8월호, 2015.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 기억할만한지나침 2015.08.14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문학동네, 2007. 해가 저물어도 그 빛은 키 큰 나무 우듬지에 걸려 있듯, 꿈은 끝나도 마음은 오랫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인생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오래 지속된다.(32~33쪽) * 나를 오랫동안 매혹시킨 몽상은 이런 것이었다. 성경보다도 훨씬 두꺼운, 아마도.. 기억할만한지나침 2015.07.15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1650년 봄, 생트 콜롱브 부인이 죽었다. 부인은 두 살과 여섯 살 난 두 딸아이를 남겼다. 생트 콜롱브 씨는 아내의 죽음이 사무쳤다. 그는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 그가 「회한의 무덤」을 작곡한 것은 아내의 죽음 때문이었다.(7쪽) * "자네는 춤추는 사람들이 춤추게 도와줄 수는 있네. 무대.. 기억할만한지나침 2015.06.15
듀나, 《가능한 꿈의 공간들》, 씨네21북스, 2015. 나는 지금도 유난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고 그 단어를 남용하는 자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다수의 등 뒤에 숨어 분명히 존재하는 타자의 괴로움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현대사회를 오염시킨 수많은 악행들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유난 떠는 종자들'이라고 무시한 둔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졌다.(11쪽) * 세상엔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을 묵살하거나 억압할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다.(13쪽) * 우주는 우리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다. 나는 사건의 가해자들이 어떻게 사건 이후에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스티븐 시걸의 팬들이 그에게서 어떤 매력을 보는지 이해하지 못.. 기억할만한지나침 2015.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