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김도언, 《불안의 황홀》, 멜론, 2010.

나는 나의 삶을 꾸준히 바라보고 다른 이의 삶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거개의 삶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를 거쳐 완성되거나 종료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원리의 발견 같은 것인데, 내 신념에 의해서 확인된 네 가지의 단계는 '욕망-투쟁-성찰-화해'이다. 나는 이것을 '진화의 변증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마다 각 단계에 머무르는 시간에 있어 현격한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네 단계를 모두 섭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욕망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투쟁의 단계를 이십 년 이상 지속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투쟁의 단계를 일 년 만에 졸업하기도 한다. 내 생각에 의하면, 욕망..

지넷 윈터슨,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2009.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어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 생각은 알고 있지만 머릿속의 단어들이 물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같다. 단어들은 뒤틀린다. 이 단어들이 수면을 치고 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세심한 작업이다. 은행 강도가 금고 문을 열기 위해 희미하게 들리는 ..

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세》, 문예출판사, 2000.

그는 자기 주변을 에워싼 인간들에게 결별을 고하리라. 그리고 가능하면 새로운 인간들에게도 접근하지 않으리라. 그는 이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 수가 없다. 인간들은 그를 마비시키고 그들 나름대로 자기네에게 유리하게만 그를 해석했다. 얼마 동안 한 장소에서 살다보면 사람들은 너무나 여러 모습으로, 소문 속의 모습으로 배회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주장할 권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만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뿐만 아니라 영원히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놓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오래 전부터 붙박고 살아왔던 이곳에서는 그러한 생활을 시작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는 로마에서라면 시도해볼 수 있으리라. 그는 로마에 도착한다. 그리고 일찍이 타인들의 마음에 남겨두었던 자신의 과거 모습에 부딪힌..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문학과지성사, 2010.

아마 물고기는 물이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할 거야. 우리가 공기를 마시면서도 허공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허공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아. 바람이 불고, 벼락이 치고, 강한 압력으로 우리 몸을 누르지. 그러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눈…… 더 높은 차원의 눈으로 우주의 공간을 볼 수 있다면, 모든 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거야.(70쪽) * 비명 같은 바람 소리가 밤새워 창틀 사이로 파고들던 그 집은 없다. 살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나아가야 했던 그 시간은 없다. 그림 없이, 삼촌 없이, 오후의 산책과 따뜻한 김이 오르는 감자 소반 없이도 모든 것이 그대로이던 시간은 없다. 보이는 모든 사물이 주먹질하듯 내 얼굴을 향해 달려들던 시간, 힘껏 부릅뜬 내 눈을 통과해 흩어지던 시간은 없다.(3..

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창비, 2010.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지금 페리 선착장에서 표를 사고 있으리라. 어떤 이들은 꿈에 대해서 에쎄이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과 상관없이 잠들기를 원한다.(73쪽, 「올빼미」 중에서) *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표현은 누가 가장 먼저 사용했을까. 뛰고 있는 심장, 살아 있는 것을 사로잡았을 때와 그렇게 사로잡혔을 때의 감정을 잘 아는 자인 그들은 사냥꾼이었을까. 그들이 따뜻한 새끼 사슴이나 토끼를 사로잡듯이. 그들은 희생물의 눈동자 속에 자기 자신을 최초로 이입시킨 자. 어디에도 출구가 없음이 너무나 명백하여 차라리 달콤하기까지 한 절대절망의 상태를 자신 안에서 상상으로 그려 보인 자. 그것을 표현이라는 방식으로 재현해낸 자들. 그렇듯 그것은 어쩌면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문학동네, 2010.

-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인 동시에 온갖 고난을 헤쳐나가며 강 저 편으로 건너가는 와중에 있네. 내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종교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야. 우리 모두는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행자일세. 그러나 물살이 거세기 때문에 그냥 건너갈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