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8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문학동네, 2007.

바다란 소란스러우면서도 고요한 살아 있는 형이상학, 바라볼 때마다 자신을 잊게 해주고 가라앉혀주는 광막함, 다가와 상처를 핥아주고 체념을 부추기는 닿을 수 있는 무한이었다.(20~21쪽) *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21쪽) - <새들은 페루에 ..

배수아, 《북쪽 거실》, 문학과지성사, 2009.

네가 그곳에 있고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과, 네가 그곳에 있고 내가 외국에 머문다는 사실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실제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그것이 파생시킬 수도 있는 온갖 가능한 가상의 거리들에 관해서 생각을 해보았는데, 일시적인 결론은 편지, 편지를 쓸 수 있으며, 내가 외국에 있으면 너에게 더욱 많은 편지를 쓸 수 있으리라는 것, 그렇게 되리라는 것,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너에게 더 많은 것을 편지로 얘기해줄 수가 있으며 내 안에서 더 많은 편지들이, 편지들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억누를 수 없는, 지나가는 순간들까지도. 오직 찰나의 기억만을 허용하고 사라져가는 순간들까지도. 우리가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결코 너에게 전달하려고 시도할 수 없었을 그런 순간들을.(19쪽) * 글을 쓴다는 ..

장 주네, 《도둑 일기》, 민음사, 2008.

나는 그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벅찬 감정으로 말한다. 그 당시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본래의 의미보다 쓸데없이 화려하고 매혹적이며 과장된 단어들이 떠오른다면, 아마도 그건 그 단어들이 드러내는 비참한 삶, 바로 내 것이었던 그 비참함을 의미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경이로움의 기원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그 비참함을 가장 고상한 물건들의 이름으로 기록하면서 그 시절의 명예를 되찾고 싶다. 나의 승리는 언어로 이룩된 것이다. 나로서는 그 호화로운 말들에 승리를 되돌려 주어야 하지만 그러한 미사여구를 구사하도록 하는 비참한 삶에 축복을 내릴 것이다.(82쪽) * 나는 너무나 무거운 슬픔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생을 계속 그렇게 떠돌게 되지 않을까 ..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휴머니스트, 2004.

예술의 영역에 나타난 한 명의 천재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마찬가지로 역사상의 별 같은 순간은 이후 수십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한다. 전 대기권의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로 빨려들어가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시간의 뾰족한 꼭지점 하나에 집약되어 실현되는 것이다. 보통은 평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