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47

단상들

* 며칠 전 S에게 "장마가 끝나서 그런지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조금 달라진 거 같지 않아요?"라고 말했더니 S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저... 아직 8월이 남았는데요."라고 말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좀 급한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8월.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20240802)  * 낮에 소나기가 지나가자 선물처럼 무지개가 떴다. 어느 하나 흠잡을 것 없는 완벽한 무지개였다.(20240807)  * 오늘이 입추다. 여름이 한창인데 입추라고 하니 기분이 묘하다.(20240807)  * 꽃은 자기가 사 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댈러웨이 부인은 손수 꽃을 사 오겠다고 했다. 꽃은 자신이 직접 사겠다고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러 가겠다고 말..

입속의검은잎 2024.08.20

단상들

*휴가라는 것이 가족들하고만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그 자명한 사실을 내가 망각하고 있었다는 걸.(20240716)  * 마시다 남은 커피에 얼음을 넣어 물처럼 마신다. 얼음은 차갑게 만들지만 연하게도 만들어 주는 것. 독해지지 말고 연해지자. 부드럽게 차가워지도록.(20240720)  * 배수아의 신작 소설을 사기 위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본다. 한 권만 사기가 뭣해서 내가 찜해놓은 리스트에 들어가 무슨 책을 더 살까 둘러본다. 하지만 내가 왜 이런 책들을 찜(?)해 놓았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내 허영과 치부를 보는 것만 같다. 대체적으로 나는 나를 잘 견디지만, 또 다른 내가 무서울 때가 있다. 이조차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20240721)  *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입속의검은잎 2024.08.02

단상들

*자신이 어느 조직에서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타인에게 얼마나 오만해질 수 있는가. 무심히 흘러나오는 오만과 무시의 언어들. 그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물론 나만의 자격지심이길 나는 바란다.(20240701)  * 오늘 하루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하루가 일주일 같다. 허나, 집에 왔으니 다른 생각을 해야지. 일터에서의 일은 일터에서 고민하고. 퇴근하고 와서까지 일터에서의 일을 고민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말이다.(20240701)  * 일주일이든 며칠이든,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게 중요하구나. 저번 주말에는 일하러 나가기도 했고, 몸과 마음이 지쳐서 청소를 안 했더니, 방바닥에 머리카락과 먼지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눈 질끈 감고 주말이 오기를 기다려야지.(20240703)  *..

입속의검은잎 2024.07.16

단상들

*왜 어떤 이들은 남자인데 여자 같다느니, 여자인데 남자 같다느니 하는 말들을 그리도 쉽게 내뱉는 것일까? 그게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듣는 상대방의 기분도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오래전에 알았던 어떤 사람이 떠오른다. 그는 견주와 함께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고, 숨길 기색이 없는 큰 목소리로 "강아지 참 못생겼다!"라고 말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주인이 다 듣겠어요!"라고 말했더니, 오히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렇게 되물었다. "못생긴 걸 못생겼다고 말하는데 뭐가 문제예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20240622)  * 소년은 동굴 안으로 끌려갔다. 이유는 모른다. 자신을 끌고 들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실 소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확실히 몰랐다. 벌판..

입속의검은잎 2024.07.05

단상들

* 이렇게 기억이 안 날 줄이야. S가 부주의하게 놓아둔 물건을 내가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몇 주가 지날 때까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그다음 날 '뭐 잊어버린 거 없어요?'라고 말하며 돌려주려 했는데! 오늘 S가 계속 그 물건을 찾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기억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건, S가 처음 그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내가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집에 있는 거 아니에요? 어디 있겠죠, 잘 찾아봐요!" 나는 점차 나를 믿을 수 없다.(20240603)  * 컴퓨터를 새로 구입했다. 모니터와 키보드도 함께 교체했는데, 이전에 오래 사용해서 뻑뻑해진 키보드를 쓰다가 새 키보드를 쓰니 이렇게 부드러울 줄이야. 글이 마치 저절로 써..

입속의검은잎 2024.06.18

단상들

*얼마 전에 미술관에 갔다가 '미술관 옆 화장실'이라고 적힌 팻말을 보았다. 그걸보고 ‘미술관 옆 동물원’을 떠올리면 옛날 사람이려나? 남자 주인공이 굉장히 무례한 캐릭터였던 것 같은데… 심은하가 쓰던 노란 우산이 떠오른다. 스틸 사진 속 배우들은 모두 풋풋하다.(20240516)  * 새 책을 사는 것도 좋고,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데, 일단 지금 읽고 있는 책을 계속 읽는 게 좋지 않을까?(20240518)  * 고향은 좋고 싫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고향은 그냥 고향인 것이다. 고향이 좋냐는 물음에 나는 늘 대답을 망설이곤 했다. 그것은 내 고향이 싫어서도 아니고 좋아서도 아니었다. 고향에 대해서라면 단정적으로 대답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20240518)  * 종일 집에..

입속의검은잎 2024.06.02

단상들

* 2년 전 오월, 나는 코로나에 걸려 격리중이었구나. 격리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그때도 5월 5일이 입하였고 2024년인 올해도 5월 5일이 입하다. 격리도, 오월도, 입하도 이래저래 다 믿기지 않는다.  거리의 이팝나무는 올해도 눈부시고.(20240502)  * 박상영의 을 막 다 읽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주인공의 찌질함에 혀를 차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던 것은, 슬퍼서라기보다 오늘 유난히 많이 날리던 송홧가루가 때마침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20240502)  * 눈으로 먼저 알게 되는 꽃이 있고, 향기로 먼저 알게 되는 꽃이 있다. 전자의 대표로는 벚꽃을, 후자의 대표로는 아카시아를 들 수 있지 않을까. 밤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서는데 달콤한 향기의 급습에 순간 걸음을 멈..

입속의검은잎 2024.05.25

단상들

* 감기 때문에 멍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멍한 사람이었는지도.(20240418) * 흔히 핑계 대지 말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삶이란 어쩌면 핑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나는 지금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삶에 핑계를 대고 싶은 걸까.(20240418) * 오늘은 하루종일 빗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우의를 입은 채였지만 비는 귀찮게 피부에 계속 와닿았다. 저녁에는 와인을 종류별로 이것저것 마셨다. 비는 계속 내렸고, 매번 불렀던 대리기사는 갑자기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비와 술에 절여지고 구겨진 기분이란 딱 이런 것이로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 하고 싶다는 뜻이겠다. 진정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은 끝끝내 해버리는 아이러니라니.(2024..

입속의검은잎 2024.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