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47

단상들

* 길고도 짧았던 추석 연휴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그 사이 시월이 되었고, 나는 감기를 얻었다. 가족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남은 것은 알 수 없는 서글픔과 우울뿐. 대화를 하면 할수록 느껴지던 너와 나 사이의 견고한 벽을 확인하고 경악했을 뿐.(20231003) * 계절의 어떤 통로를 지나고 있다. 반팔옷을 입은 사람과 폴라티를 입은 사람을 동시에 보았다. 잘 때 이불을 덮으면 덥고 덮지 않으면 춥다. 햇볕은 따가운데 그늘에 있으면 시원하다. 이렇게 해야 할지 저렇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자주 빠진다. 수상한, 계절의 어떤 통로를 지나고 있다.(20231003) * 올해 노벨 문학상은 내게는 생소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받았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니 네 권 정도가 나오는데 모두 e-b..

입속의검은잎 2023.11.03

단상들

* 머리와 몸이, 거대한 바위에 묶인 채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다. 무겁고 무겁다. 피로가 이렇듯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것이었던가? 책을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다. 도무지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선선한 바람과 풀벌레 소리 가득한 9월의 밤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그런 와중에, 주문하고 나서 잊고 있던 책이 발송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하루키의 신간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배수아가 번역한 엘제 라스커 쉴러의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그 문자가 내게 아주 잠깐의 설렘을 가져다주었으나 그뿐이었다. 나는 어서 내 몸과 화해하기를 원한다.(20230906) * 책 왔다. 진정한 가을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하려니 갑자기 낯이 간지럽다. 그냥 이렇게 말하련다. 책과 함께..

입속의검은잎 2023.10.07

단상들

* 펄펄 끓는 늪지에서 상승한 고통스러운 몽상의 제국이 팔월의 도시 위로 둥실 떠올랐다. 사람들의 꿈을 잠식했다. 한여름의 체온보다 더 뜨거운 공기는 투명하고 견고한 총알이 되어 아주 느린 속도로 더운 심장에서 심장으로 관통하며 여행했다.(배수아,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중에서) 뜨거운 여름이면 생각나는 배수아의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팔월의 도시 위로 둥실 떠오르는, 펄펄 끓는 늪지, 고통스러운 몽상의 제국, 잠식당하는 꿈, 견고한 총알이 되어 느린 속도로 더운 심장에서 심장으로 관통하는 뜨거운 공기. 아, 타는듯한!(20230806) * 어느 순간, 과거에 내가 쓴 글을 읽고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쥐구멍으로 숨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무언가를 쓴다면, 그것은 창피함을..

입속의검은잎 2023.09.16

단상들

* 갑자기 이 모양 이 꼴로 살다가 죽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 세상 서럽고, 죽어서도 벌떡 일어날 것 같은데, 또 한편으로는 이 모양 이 꼴이 어때서 라는 생각이 들면 그땐 그런대로 괜찮아지는 것이다.(20230710) * 예고편도 그렇고 이번에 공개된 예고편을 보면서 새삼 느낀 것. 티모시 샬라메가 원래 그런 목소리였던가? 한껏 소리 지르는 장면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새삼 낯설어서, 이건 누구 목소리지? 했다.(20230713) *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하니 구차한 기분이 든다. 오해하라면 오해하라지. 어차피 우리는 오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사라져 갈 뿐인 존재들이 아닌가. 오해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오해가 풀릴 날도 있을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아무도 ..

입속의검은잎 2023.08.15

단상들

*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라는 말은 얼마나 힘이 없고 무색한가.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마음을 정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없는데 반드시 원해야 하는 상황이란 얼마나 난감한가.(20230616) * 어떤 이가 서점에 갔다가 배수아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나는 무슨 칭찬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어떤 책을 보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20230618) *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시간들을 지나고 있다. 책도 읽히지 않고, 영화도 시들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은 더욱 하기 싫은, 그런 상태. 며칠 야근을 해서 좀 지쳤기 때문일까. 아님 본격..

입속의검은잎 2023.07.13

단상들

* 모 시인의 시집 출판과 관련한 설문조사 항목을 보고 있으니, 문득 내가 대학 신입생 시절, 설문조사를 한다며 다가왔던 어떤 이가 생각났다. 그의 목적은 결국 전도였다. 전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설문조사를 빌미로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달까,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문조사란 그런 것인가? 그것은 누군가를 교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특정 혹은 불특정 대상의 생각을 듣고자 함이 아닌가? 차라리 입장문이면 어떤가. 당당하게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거나 우매한 민중을 가르치기 위한 것을 설문조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독자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20230518) * 어쩌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한 것은 불안이었을까. 퇴근길, 불안의 어두운 그림자가 또 나를 뒤따른다. 사라진다면 ..

입속의검은잎 2023.06.17

단상들

* 무라카미 하루키의 15번째 장편소설,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이 13일 일본에서 출판되었다고 한다.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니. 제목이 마음에 든다. 이후 6년 만에 나온 장편이라니. 헌데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무슨 내용일지 궁금하다.(20230428) * "여행은 발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글로 하는 여행이다." 여수에 갔을 때 묵었던 호텔 복도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독서와 여행은 어디에서나 이루어진다.(20230429) * 이상하지, 나는 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눈을 감는 걸까? 눈을 감으려고 한 게 아닌데 늘 찍힌 사진을 보면 눈을 감고 있다. 그래서 더 사진 찍는 일을 꺼려하는지도. 찍으려면 뒷모습을 찍어줘. 내가 의식하지 않는 내 뒷모습을. 나는 늘 그렇게 말하곤 하는 것이..

입속의검은잎 2023.05.21

단상들

* 가지기 전에는 그리도 빛나 보이던 것이 막상 가지고 나면 금방 시들어 버린다는 것을 너는 미처 알지 못한다. 너의 열망이 크면 클수록, 그 열망으로 인해 어느 순간 네가 견디기 힘들어지게 될 것임을. 미리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고통받는다. 하지만 안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20230417) * '아무 몸도 아니고 아무 사람도 아니고 아무 사물도 아니며, 아무 곳, 아무 시간에도 있지 않은' 상태란 어떤 어떤 상태일까?(20230420) * 첫 문장이 아니라 마지막 문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니.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에 다다른 문장을. 시작의 끝과 끝의 시작을.(20230423) *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기쁨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듯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슬픔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입속의검은잎 2023.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