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025

하나코는 없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소설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한국 소설가의 작품을 많이 읽지 않았던가? 무엇이 다시금 나를 순수한(?) 한국 소설에 이끌리게 한 것인가? 한동안 외국 작가의 번역된 소설만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번역투의 문장이 주는 압력(?)에 얼마간 지친 것인지도(내가 그런 문장들을 유별나게 싫어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좋아하기까지 하면서도). 하지만 심신이 지칠 만큼 외국 소설에 빠졌던 적이 있던가?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무언가에 탐닉한다는 것, 중독된다는 것은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대학시절 어떤 교수님이 내게 말했다. "너는 종교를 가지면 안 될 것 같구나." "왜요? 교수님?" "내가 보기에 네가 신을 믿는다면 맹신에 빠질 위험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

어느푸른저녁 2024.03.25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연인』을 다시 읽었다. 책표지는 장자크 아노의 필름 한 장면이었다. 속표지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취리히에 있는 R에게 편지를 썼고, 베를린의 책장을 뒤지다가 우연히 당신이 번역한 『연인』을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나는 오래전 대학 시절에 읽었으므로 당연히 이 책을 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다시 읽으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첫 페이지를 펼쳐든 순간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었노라고. 내가 삼십 년 전 모국어로 읽었던 당시에는 이 책이 내용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과거에 내가 읽은 것은 다른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썼다.(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작별들 순..

흔해빠진독서 2024.03.18

W. G. 제발트, 《전원에 머문 날들》, 문학동네, 2021.

언제나 내게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문인들의 끔찍스러운 끈기다. 글쓰기라는 악덕은 너무나 고약해서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 이 악덕에 빠진 자들은 글쓰기의 즐거움이 사라진 지 오래여도, 심지어 켈러가 말했듯 나날이 바보천치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중년의 위기가 찾아와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멈추고 싶다는 생각만큼 절박한 바람이 없는 때에도 그 악덕을 계속해서 실천한다.(8쪽) * 우리는 글쓰기를 별로 영웅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확하지 않은 것은 아닌 방식으로 자신을 항상적으로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강박적인 행위로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행위는 작가야말로 사유라는 병에 시달리는 주체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불치의 환자라는 것을 입증한다.(69쪽) * 화가 프리드리..

단상들

* 하늘이 깨질 것처럼, 지붕을 뚫을 것처럼 그렇게 격정적인 비가 아니라, 얼핏 보면 오는지도 모르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울음을 참고 있는,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 같은, 그런 비에 대하여.(20240219) * 오늘 퇴근길의 느낌은 여느 때와 사뭇 달랐다. 내가 차를 운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차가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교체한 타이어의 문제는 아닐 테고... 오늘 내리는 비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성분이라도 들어 있었던 걸까?(20240219) * 피곤한데 맥주를 한 잔 마시니 피곤이 두 배로 밀려오면서 몸을 가누지를 못하겠다. 자면 그만이지만 지금 시간에 자는 건 왠지 억울하고... 그저 몽롱한 상태로 앉아 있다.(202402..

입속의검은잎 2024.03.13

나윤선 - Hallelujah

오랜만에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CD들을 훑어본다. 차분히 음악을 듣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괜한 욕심으로 사모은 CD들을 보고 있으니 나 자신이 어쩐지 창피해지기까지 한다. 듣기 위한 것이 아닌 소유하기 위한 것들.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윤선의 이라는 앨범이 눈에 띈다. 사놓고 몇 번이나 들었을까? 2019년도에 나온 앨범이라니. 차분히 듣고 있으니 독특하고, 재밌다(?). 마지막 수록곡이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다. 언제 들어도 매력적인 곡이다. 나는 지금 절실한가? 절실해지고 싶은가? 모르겠다, 정말 모를 일이다.

오후4시의희망 2024.03.09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민음사, 2007.

어느 날, 공중 집회소의 홀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이미 노인이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당신은 젊었을 때가 더 아름다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지금의 당신 모습이 그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의 당신, 그 쭈그러진 얼굴이 젊었을 때의 당신 얼굴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9쪽) *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하고 싶은 얘기는,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을 때의 얘기다. 메콩 강을 나룻배로 건넜다. 그 영상은 강을 건너는 동안 줄곧 이어졌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고, 그 나라에는 계절이 없었다. 우리는 오직 한철뿐인, 무덥고 단조로운 계절에 묻혀 있었다. 봄..

역사가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 누군가 이 책을 원서로 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누군가의 서평을 읽었을 때도 그저 무덤덤했다. 그저 재미 교포 2세가 쓴 일본 교포들에 대한 이야기로구나 하면서 무심히 넘겼던 것이다. 그러다 애플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에 대한 영상이 유튜브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흥미가 생겼다. 예고편을 보았고, 드라마에 나온 배우들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그들의 인터뷰와 드라마의 원작 소설가인 이민진의 여러 인터뷰까지 보게 되었다. 예고편으로 본 드라마의 영상미에 매료되었고, 무엇보다 이민진이라는 작가의 인터뷰가 -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내가 무려 '가족'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저..

흔해빠진독서 2024.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