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038

누가누가 더 잔인한가

"넌 남이잖아!" 아버지가 말했다. 그것은 내가 혈육의 아픔을 마치 남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일 터였다. 정말 남이었으면 어땠을까? 정말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이었으면? 하지만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걸, 그것만큼 소용없는 생각도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 질문의 잔인함에 뒤늦은 경악이 들었는데, 그조차도 이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에, 잔인한 건 아버지인지 나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가족이란 어쩌면 서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으며, 불행 속에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저주를 타고난 존재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이 저주인 이유는 상처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신기할 정도의 치유제 또한 부여했다는 데 있다. 영원한 형벌을..

어느푸른저녁 2024.06.18

단상들

* 이렇게 기억이 안 날 줄이야. S가 부주의하게 놓아둔 물건을 내가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몇 주가 지날 때까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그다음 날 '뭐 잊어버린 거 없어요?'라고 말하며 돌려주려 했는데! 오늘 S가 계속 그 물건을 찾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기억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건, S가 처음 그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내가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집에 있는 거 아니에요? 어디 있겠죠, 잘 찾아봐요!" 나는 점차 나를 믿을 수 없다.(20240603)  * 컴퓨터를 새로 구입했다. 모니터와 키보드도 함께 교체했는데, 이전에 오래 사용해서 뻑뻑해진 키보드를 쓰다가 새 키보드를 쓰니 이렇게 부드러울 줄이야. 글이 마치 저절로 써..

입속의검은잎 2024.06.18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뭔가 희끗한 것의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사무실에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게 보인다. 사무실에 나비라니!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다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잠시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고 흰나비의 머뭇거리는 비행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아니다. 내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비의 마지막을 생각하다니. 하지만 지금 내가 여기서 하는 것들은 모두 마지막이다. 7월부터는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나비를 오해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나비는 내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비에게도 매 순간이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작이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세상 끝의..

어느푸른저녁 2024.06.11

단상들

*얼마 전에 미술관에 갔다가 '미술관 옆 화장실'이라고 적힌 팻말을 보았다. 그걸보고 ‘미술관 옆 동물원’을 떠올리면 옛날 사람이려나? 남자 주인공이 굉장히 무례한 캐릭터였던 것 같은데… 심은하가 쓰던 노란 우산이 떠오른다. 스틸 사진 속 배우들은 모두 풋풋하다.(20240516)  * 새 책을 사는 것도 좋고,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데, 일단 지금 읽고 있는 책을 계속 읽는 게 좋지 않을까?(20240518)  * 고향은 좋고 싫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고향은 그냥 고향인 것이다. 고향이 좋냐는 물음에 나는 늘 대답을 망설이곤 했다. 그것은 내 고향이 싫어서도 아니고 좋아서도 아니었다. 고향에 대해서라면 단정적으로 대답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20240518)  * 종일 집에..

입속의검은잎 2024.06.02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정말이지 나는 내부에서 스스로 나오려는 것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왜 그다지도 어려웠던가?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 오래전에 저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그 문장이 내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로, 당연한 문제로 내게 새겨졌다. 나의 내부에서 스스로 나오려는 것을 사는 일, 그러니까 진정한 '나'로 사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시 어렸던 나는 내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로 살아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감할 수 있었다. 아니, 온몸으로 직감했다. 저 문장은 내 생의 화두가 될 것임을. 내 온 삶을 관통하는 문장이 될 것임을.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고 나는 저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

흔해빠진독서 2024.05.26

단상들

* 2년 전 오월, 나는 코로나에 걸려 격리중이었구나. 격리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그때도 5월 5일이 입하였고 2024년인 올해도 5월 5일이 입하다. 격리도, 오월도, 입하도 이래저래 다 믿기지 않는다.  거리의 이팝나무는 올해도 눈부시고.(20240502)  * 박상영의 을 막 다 읽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주인공의 찌질함에 혀를 차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던 것은, 슬퍼서라기보다 오늘 유난히 많이 날리던 송홧가루가 때마침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20240502)  * 눈으로 먼저 알게 되는 꽃이 있고, 향기로 먼저 알게 되는 꽃이 있다. 전자의 대표로는 벚꽃을, 후자의 대표로는 아카시아를 들 수 있지 않을까. 밤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서는데 달콤한 향기의 급습에 순간 걸음을 멈..

입속의검은잎 2024.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