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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헤세가 사랑한 순간들』, 을유문화사, 2015.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적어도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할아버지 집에 있던 책장의 거의 모든 책들은 고모의 것이었는데,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지만 주로 철학 서적과 소설책들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종이로 씌워진 책등에 볼펜으로 멋들어지게 제목을 써놓았고, 나는 할아버지의 필체로 쓰여진 책들의 제목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오로지 제목만으로 상상해보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바라보던 책 중에 헤세의 '데미안'이나 '유리알 유희',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소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헤르만 헤세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의 소설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급기야 '유리알 유희'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소설을 읽어..

흔해빠진독서 2016.03.21

헤르만 헤세, 《헤세가 사랑한 순간들》, 을유문화사, 2015.

외국의 풍광과 도시를 직면할 때 유명하거나 눈에 확 들어오는 것만 찾지 않고 본원적이고 좀 더 심오한 것을 발견하고 사랑으로 이해하려는 여행자들이 있다. 그런 사람의 기억에는 대게 우연히 마주친 작은 사건들이 특별한 광채를 빛내며 담겨 있기 마련이다.(36쪽) * 나는 산 미니아토를 떠올렸다.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과 돔형 지붕에 대해서, 그리고 나를 그 예술 작품들로 향하게 만든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들은 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걸까?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한 인간의 고된 작업과 헌신은 무가치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들이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각자의 고독 너머에, 인류 공통의, 바람직하고 귀하고 소중한 보편성이 존재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오랜 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수백 명의 예술가들이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