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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 하루가 끝날 때, 우리 안의 그 무엇이 허무한 고통이란 형태로 끝이 나는지. 우리가 단지 그림자들 사이의 허상에 불과한지. 현실이란, 충격으로 깨어지기 전까지는 호수 위 갈대밭에 야생오리 떼가 내려앉지 않는 거대한 침묵에 불과한지.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조차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단지 해초만이 가득하다. 미래의 하늘이 부드러운 몸짓으로 다가온다. 잔잔한 미풍 속에서 불확실성이 서서히 열리며 별이 나타난다. 고립된 사원에서 신에게 봉납된 횃불이 흐릿하게 펄럭인다. 버려진 농장의 저수자가 햇빛 속에서 고요하게 정지한 호수로 변한다. 그 누구도 한때 나무둥치에 새겨졌던 이름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모르는 자들의 특권이 아무렇게나 찢어발긴 종잇조각처럼 ..

불안의서(書) 2015.08.17

우리는 늘 실패한다

우리의 실패와 변화도 이 사소한 것들과 세상의 거창한 이론들이 맺게 되는 관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실패한다. 우리가 배웠던 것, 세상의 큰 목소리들이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들과 우리의 사소한 경험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엇나갈 때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 큰 목소리들 앞에서는 항상 '당신의 사정'이다.……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의 순간마다 변화한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안고 있는 이 사소한 당신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어느푸른저녁 2015.08.12

시간은 불확실하며, 하늘은 멀기만 하고, 인생은 언제나 낯설기 때문에

인간은 아이 같은 본능이 있기 때문에, 설사 우리 중 가장 자존심이 드높은 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인간이고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오 자비로우신 신이여! 세상의 비밀과 혼돈을 헤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이끌어줄 부성적인 손길을 그리워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삶의 바람이 한번 휘몰아치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땅바닥에 내려앉는 먼지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단단한 지지대, 우리의 작은 손을 편안히 맡길 수 있는 어떤 다른 손을 간절히 바란다. 시간은 불확실하며, 하늘은 멀기만 하고, 인생은 언제나 낯설기 때문이다.(321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 지금도 간혹 그런 생각을 하지만, 어렸을 때는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마음이 한없이 넓어서 내가 무얼 하든다 받..

불안의서(書) 2015.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