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배수아, 《내 안에 남자가 숨어있다》, 2000, 이룸.

우리는 성적으로 명랑쾌활한 이탈리아인도 아니고 바커스의 축제에 참가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비록 은밀한 감동에 떨었던 순간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감동을 우리 인생의 전면에 내세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왜 언제나 반드시 완전무결해야 하는가. 또는 완전무결을 지향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는 자유롭게 비위생적이 되거나 비상식적이 되어도 된다. 그것은 완벽한 기호의 문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털어놓고 용서를 바랄 필요도 없다. 혹 그것 때문에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몫이다. 그러나 그대, 고통 하나 없는 완전한 인생을 진정 원하는가? 상처 없는 관계를 원하는가? 하나의 비밀도 가지지 않기를 원하는가? 죽을 때까지 마음 아플 일이 없기를 바라는가?..

이승우, 《그곳이 어디든》, 현대문학, 2007.

자연의 운동은, 엄격한 규칙과 질서를 내부에 숨긴 채 무질서와 무작위의 외양을 보인다. 반면에 사람의 손이 닿으면 아무리 무작위로 어지럽게 흩어놓은 것 같아도 어딘가 정연한 질서의 외양이 나타난다. 자연의 운동은 자연스럽지만 자연을 흉내 낸 인간의 운동은 자연만큼 자연스럽지 않다.(133~134쪽) * 감각이 날뛰는 한 누구도 평화로울 수 없는 법이다. 날카롭게 벼려질수록 성가신 것이 감각이다. 죽은 자가 왜 평화로운지 말 할 수 있다면 세상살이가 왜 성가신지도 대답할 수 있다. 감각은 살아 있다는 징표이면서 모든 불화들의 근거이다. 평화로운 자는 감각을 잃거나 버린 자이다. 살아 있는 채로 감각을 잃거나 버리는 일이 가능한가? 하고 질문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부..

오스카 와일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일신서적출판사, 1992.

「알고 나면 끝이야. 불확실한 것이야말로 매력이 있는 거지. 안개는 사물을 멋지게 보이게 하지 않는가?」 「길을 잃을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길은 똑같은 종점에 도달하지. 이봐, 글래디스.」 「그렇다면요?」 「환멸이라는 종점이야.」 「환멸이야말로 내 인생의 출발점이이에요.」(311쪽) * 나를 파멸시킨 것이 나의 아름다움이다―내가 기도하며 원했던 아름다움과 젊음이 파멸의 근원인 것이다. 이 두 가지만 없었더라도 내 생애는 오염되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젊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새파랗게 젊은 미숙한 시기란, 천박한 기분과 병적인 사상의 시기가 아닌가. 어째서 나는 젊음의 옷을 몸에 둘러 버렸단 말인가? 젊음이 나를 망쳐 버린 것이다.(332~333쪽)

윤대녕, 《제비를 기르다》, 창비, 2007.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갖는 기대와 희망의 대부분은 알고 보면 타인에게 애써 요구하고 있는 것들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상대를 객관적인 타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부모라고 하는 사람들이 또다른 타인인 자식들을 위해 출가를 시킨 뒤에도 다 늙어서까지 한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보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적어도 이미 윤리적 사명은 완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것을 일방적으로 의무로 평가하고 때로 가혹하게 폄하하고 더한 요구를 하게 될 때 그들 몫의 설자리는 그만큼 옹색하고 누추해지기 마련이다. - 윤대녕, 중에서

2008 이상문학상작품집 《권여선, 사랑을 믿다 외》, 문학사상사, 2008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41쪽) - 권여선, 중에서 *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76쪽) - 권여선, 중에서

파스칼 브뤼크네르, 《아름다움을 훔치다》, 문학동네, 2001.

거짓말쟁이에게 최악의 사태는 어쩌다 한 번 그가 진실을 말하게 되는 경우에도 사람들이 그걸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102쪽) * 왜 미녀들일까, 신사분들? 왜냐면, 유명한 경구와는 반대로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 아니라 재앙의 확신이기 때문이지. 아름다운 존재들은, 남자거나 여자거나, 우리 속으로 내려와서 그 완전무결함으로 우리를 조롱하는 신들이니까. 지나는 곳마다 분열과 불행을 뿌리고 각 인간을 제 자신의 하찮음으로 돌려보내는 존재들이지. 미(美)는 아마도 빛, 그러나 밤을 더 어둡게 해주는 빛이야. 그것은 우리를 아주 높이 들여올렸다가 곧바로 바닥에 내팽개쳐버려 사람들은 그것에 접근했던 것을 후회하게 되지.(171~172쪽) * 인간의 아름다움은 더할 나위 없는 부당함이야. 단지 그 외관만으로 어떤 ..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2005.

나는 언젠가 내가 인생의 무의미함에 대해 깊게 탄식했을 때 니나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묻지 않는 자만이 해답을 알아요.(27쪽) * 우울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65쪽) * 당신은 나에게 몹시 고독하다고 말했고 그 말에 대해 나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당신은 진부하게 받아들였을 테지만, 그러나 사실..

조지 오웰, 《동물농장》, 민음사, 2005.

열두 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 맞고함질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