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요시모토 바나나, 《아르헨티나 할머니》중에서

"사람이 왜 유적을 만드는지 알아?" 옛날에 둘이 옥상에서 내가 사온 참깨 과자를 먹을 때, 유리 씨가 내게 물었다. 아빠는 장 보러 가고 없었던 것 같다. 화창한 5월, 동네 여기저기에서 잉어 드럼이 팔랑팔랑 헤엄치고 있었다. 그때 먹었던 과자의 참깨 맛을, 그때 마셨던 우유의 시원한 맛을 지금도 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중에서

...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되면,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알지 못하는 지역의 길, 뜻밖의 만남, 오랫동안 다가오는 것을 지켜본 이별,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유년..

장정일, 《생각》중에서

용기 "나도 랭보가 될 수 있었는데…." 하고 푸념을 한다. "…하지만 나는 랭보 같은 용기가 없었다"고 자책한다. 민음사에서 나온 두 권의 시집을 내고 직장을 찾아야 했다. 시작을 끝내는 것과 함께 글쓰기에서 손을 씻어야 했다. 랭보처럼 글을 잘 썼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랭보처럼 글쓰는 일로부터 깨끗이 떠날 수 있었는데도 떠나지 못했다는 푸념과 자책이 오늘까지 나를 괴롭힌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변변한 졸업장도 없다. 배운 기술이라곤 글쓰기 뿐. 그래서 소설을 쓰게 되었고, 절필할 때 하지 못하고 글판에 어기적거리다가 감옥까지 가게 됐다. 하지만 절필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용기의 문제라고 해야 한다. 랭보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는지 혹은 졸업장이 많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 정체성 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