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8

장정일, 《생각》중에서

용기 "나도 랭보가 될 수 있었는데…." 하고 푸념을 한다. "…하지만 나는 랭보 같은 용기가 없었다"고 자책한다. 민음사에서 나온 두 권의 시집을 내고 직장을 찾아야 했다. 시작을 끝내는 것과 함께 글쓰기에서 손을 씻어야 했다. 랭보처럼 글을 잘 썼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랭보처럼 글쓰는 일로부터 깨끗이 떠날 수 있었는데도 떠나지 못했다는 푸념과 자책이 오늘까지 나를 괴롭힌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변변한 졸업장도 없다. 배운 기술이라곤 글쓰기 뿐. 그래서 소설을 쓰게 되었고, 절필할 때 하지 못하고 글판에 어기적거리다가 감옥까지 가게 됐다. 하지만 절필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용기의 문제라고 해야 한다. 랭보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는지 혹은 졸업장이 많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 정체성 탁..

르 클레지오, 《조서》, 민음사, 2001.

성가셔진 자신의 육체에 대한 감각은 사소한 일들을 증폭시켜 그의 존재 전체를 고통으로 가득한 괴물 같은 대상으로 만들었고, 그때 살아 있다는 의식은 그저 물질에 대한 짜증스러운 인식일 뿐이었다. * "내가 뭘 바라는지 아세요? 난 사람들이 날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면 해요. 아니, 어쩌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몰라요…… 난 많은 것을 하고 싶습니다. 내가 아닌 일을 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하라고 하는 일. 내가 여기 왔을 때, 간호원들이 내게 얌전히 굴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내가 하려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난 얌전히 굴거예요. 죽는 것, 아뇨, 정말이지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말이죠, 죽는다는 건 분명 그다지 휴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닐 테니까요. 그건 마치 태어나기..

김경욱 소설집,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중에서

결국 단 한 번뿐인 삶이 미욱한 영혼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프로그램이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극장에 갔다는 사실 자체이듯, 소중한 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라는 것. 살아서, 떠나온 어떤 거리와 그 거리를 떠돌던 열망과 절망의 공기와, 그 혼란스럽던 공기를 함께 들이켰던 10년 전의 어떤 얼굴들을 떠올리는 것. 아득하게 떠올리는 것. 삶을 삶이게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닐까. - 김경욱 단편, 중에서

파트릭 모디아노,《슬픈 빌라》중에서

세월이 이 모든 것을 여러 가지 다른 색깔로 뒤섞여 있는 안개 같기도 하고 수증기 같기도 한 것으로 뒤덮고 말았다. 때로는 희끄무레한 초록빛, 때로는 약간 분홍빛이 나는 푸른색으로 그 추억들은 채색되어 있다. 수증기……아니다. 차라리 모든 소리를 감싸 들리지 않게 하고 도저히 찢어버릴 수 없는 투명한 장막 같은 것이어서 나는 그것으로 가려진 이본느와 맹트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행여나 그 장막으로 해서 그들의 실루엣마저 사라져버리고 이제 그들에 대한 추억의 한 조각마저도 잃어버리게 될까봐 조바심이 난다……. *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해 방임하는 나의 태도는 사실은, 움직임에 대한 공포, 흘러 사라져버릴까봐, 바뀌어버릴까봐,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한쪽이 벌써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