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은희경,《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창비, 2007.

그때부터 나의 공상이 다시 시작됐어요. 가령 이런 거예요. 이 세상에 나는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고 수줍은 나도 있고 말 잘하는 나도, 어리석은 나도, 그리고 아름다운 나도 혐오스러운 나도 다 있어요. 그것들은 흩어져 존재하지만 어느 한순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면 ..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2006.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도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

장정일, 《보트 하우스》, 프레스21, 2000.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크게 구해내는 건 사랑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랑은 반복의 지옥에 빠진 우리를 번쩍드어 단숨에 변화의 신세계에 올려주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반복되는 나날과 삶으로부터 우리를 일탈시켜주거나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온 맘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큰 희망이다. 그것은 반복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반복 가운데서 쉬게 하고 힘을 얻게 하며 그 곳에서 자유를 얻게 한다.(98쪽) * 숱한 가구들 중에 가장 위엄있고 고상한 것은 의자다. 어떤 의자든지 인격을 가지고 있고 개성을 가지고 있다. 장롱이나 침대는 살아있는 사물처럼 보이지 않아도 의자는 살아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의..

최용건, 《라다크, 그리운 시절에 살다》, 푸른숲, 2004.

삶은 극점에 머물 때라야 자아가 극명하게 드러나 보이며, 나아가 그을음 한 점 없는 맑은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삶의 극점에 서보지 않고서는 평화로움도 누릴 수 없으리라. 극점에 대한 체험이 결여된 평화는 권태의 잠복기간에 불과할 뿐. (95쪽) - 최용건, 《라다크, 그리운 시절에 살다》중..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2006.

-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혼자 금 밖에 남겨진 자의 절박함과 외로움으로 잠깐 이성을 잃었었다는 핑계는 대지 않겠다.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