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8

김언수, 《캐비닛》, 문학동네, 2007

그러나 나는 병원에서 일한다고 모두가 의사는 아니며, 공군에 근무한다고 모두가 전투기 조종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조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투기가 거꾸로 날거나 논두렁에 처박혀서 경운기의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선 누군가 그 큰 바위를 제대로 갈아끼우고, 비행기 이곳저곳을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하며, 또 누군가는 깃발을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조종사와 비행기만으로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폼나지 않는 일을 해줘야만 비행기가 논두렁이나 하수구에 쳐박히지 않고 하늘을 제대로 날 수 있다는 것,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거다. 대표성의 잣대에 기대지 말고 개별성의 잣대로 사람들을 대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

은희경,《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창비, 2007.

그때부터 나의 공상이 다시 시작됐어요. 가령 이런 거예요. 이 세상에 나는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고 수줍은 나도 있고 말 잘하는 나도, 어리석은 나도, 그리고 아름다운 나도 혐오스러운 나도 다 있어요. 그것들은 흩어져 존재하지만 어느 한순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면 ..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2006.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도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

장정일, 《보트 하우스》, 프레스21, 2000.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크게 구해내는 건 사랑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랑은 반복의 지옥에 빠진 우리를 번쩍드어 단숨에 변화의 신세계에 올려주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반복되는 나날과 삶으로부터 우리를 일탈시켜주거나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온 맘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큰 희망이다. 그것은 반복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반복 가운데서 쉬게 하고 힘을 얻게 하며 그 곳에서 자유를 얻게 한다.(98쪽) * 숱한 가구들 중에 가장 위엄있고 고상한 것은 의자다. 어떤 의자든지 인격을 가지고 있고 개성을 가지고 있다. 장롱이나 침대는 살아있는 사물처럼 보이지 않아도 의자는 살아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