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들녘, 2003.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 사는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대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어떻게 하면 끝장이 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시대를 연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그것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그것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그것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산..

진중권,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휴머니스트, 2008.

오늘날의 상상력은 기계공학, 정보공학, 유전공학이라는 테크놀로지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상상력은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서의 말대로 '기술적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상상과 현실 사이에 놓여 있던 질료의 저항을 점점 더 무력화시키고 있다. 상상이 질료의 저항 없이 곧바로 현실로 전화하게 된 것이다. SF는 더 이상 문학의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아예 현실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상상력의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미래의 생산력은 상상력이 될 것이다.(9쪽) * 완전히 우연적인 예술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 우연히 발생한 여러 경우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은 어차피 예술가의 과제로 남기 때문이다. ..

아멜리 노통브, 《배고픔의 자서전》, 열린책들, 2006.

내 배고픔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자. 음식에 대한 배고픔일뿐이었다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게 있을까? 음식에만 배고픈 게? 보다 광범위한 배고픔의 징표가 아닌, 단순한 밥통의 배고픔이라는 게 있을까? 배고픔, 나는 이것..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04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글을 써내려가는 장면을 상상할 때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을 떨칠 수가 없다. 누군가 그런 소설을 가리켜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고 말했다. 식탁에 앉아서 쓰는 소설이라는 뜻인데, 전문적인 소설가가 아니라 일반인의 처지에서 쓴 소설이 크게 인정받았을 때 붙이는 이름인 듯하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

김언수, 《캐비닛》, 문학동네, 2007

그러나 나는 병원에서 일한다고 모두가 의사는 아니며, 공군에 근무한다고 모두가 전투기 조종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조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투기가 거꾸로 날거나 논두렁에 처박혀서 경운기의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선 누군가 그 큰 바위를 제대로 갈아끼우고, 비행기 이곳저곳을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하며, 또 누군가는 깃발을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조종사와 비행기만으로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폼나지 않는 일을 해줘야만 비행기가 논두렁이나 하수구에 쳐박히지 않고 하늘을 제대로 날 수 있다는 것,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거다. 대표성의 잣대에 기대지 말고 개별성의 잣대로 사람들을 대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