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2000

도무지 비교할 방법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초벌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란 용어도 정확지 않은 것이, 초벌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밑그림,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란 초벌그림은 완성작 없는 밑그림, 무용한 초벌그림이다.(15쪽) *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가루가 그린 형..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 지성사, 2002.

그때 나는 그의 손을 보았다. 그의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가 뭉툭하게 동강나 있었다.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잘려져 있었을 뿐이다. 힘없이 허공을 향해 펼쳐져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 그에게 주먹질을 한들,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인생은 쓰레기였다고 단정을 내린들, 그는 맞대거리를 할 수도, ..

배수아, 《당나귀들》중에서

나는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데, 적어도 그래야만 하는데, 내가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고백하자면, 단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난 지금 한 마리 당나귀야.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나는 내 존재에 대해서 계속해서 사유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거야. 내 생각은 거기서부터 나왔어. 그래, 네 말대로 그것은 몽상의 시작이야. 그러나 나는 삶이 몽상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분리될 수 있다는 네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어.(33쪽) * 음악에는 구체적 선율 이외의, 내재적 개성이라고 할 만한 독특한 울림이 있는데,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듣는 자가 자신을 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음악을 듣는다. 집중할 수도 있고 또 그 안에..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중에서

"나는 삶을 사랑해. 난 자유로워. 이렇게 여행하다 보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잖아? 오늘 너를 만난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느껴. 인디언 바구니 짜는 법을 백인들에게 강습한 적이 있지. 그때마다 난 말했어. 당신들이 만든 바구니에 기쁨을 담으라고." * "중세시대의 성당을 알아?" "성당?" "하나의 성당이 완성되려면 삼사백 년씩 걸렸던 성당들 말이야. 거기 하나하나 벽돌을 놓던 인부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생애에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했지." 그는 편지봉투에 성당과 인부를 끄적여 그리면서 말했다. "결국 우리가 그 사람들과 같지 않을까.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고 해도, 결코 그 성당의 완성을 볼 수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