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배수아, <철수> 중에서

날 태워봐. 기름을 바르고 내 몸에 불을 붙여봐. 마녀처럼 날 화형시켜봐. 쓰레기 봉지로 날 포장해서 소작로 속으로 집어던져봐. 나는 다이옥신이 되어 너의 폐 속으로 들어간다. 내 얼굴을 면도칼처럼 가볍게 긋고 스며나오는 피를 빨아봐. 고양이처럼 그 맛을 즐겨봐. 그래서 나는 피투성이가 되고 싶어. 내 안에 있는 나는 무엇인지, 어떤 추악한 것인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로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되는 것이 두려워 나는 마지막에 비명을 지르면서 눈물을 흘리리라. * 그런데 그때 조용하게 비를 맞으면서 무너져가는 빈집의 창가를 무생물의 풍경처럼 지나가고 있는 또 다른 나. 너는 어디에서 한평생 살고 있었나. 너는 어디에서 노래를 부르고 마루에서 고양이를 잠재우며 흡혈식물 같은 입술을 닫고 지나가는 아침 노을..

배수아, <이바나> 중에서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고의적으로 말하기를 피한다. 그것은 수치나 허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 우리는 침묵에 복종한다. 그것은 강요당한 상태이다.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영혼'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격정에 빠진 연인은 스스로 추방되기를 원한다. 사회나 제도, 결혼에 등을 돌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은밀한 방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문을 잠근다. 거기 머문다. 사랑이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날 때, 우리는 목욕탕에서 스스로 머리칼을 자른다. 머리칼이 없다면 팔이나 혀를 자르거나 눈을 잃게 된다. 고통에 대하여, 육체란 영혼의 언어이다. 영혼은 육체를 빌려 말한다. 사랑이여, 베어나간 내 살이여. 자신의 일부가 베여나가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단지 섬뜩..